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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극장쑈 무대

털보아찌 2008. 11. 12. 20:21

변두리 옛날 극장에 가면 지금도 스크린이 있는 앞쪽에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멀티플렉스 세대는 ‘영화관에 웬 무대’ 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그 무대야말로 1960년대 대중음악의 가장 뜨거웠던 현장을 말없이 증언한다.
 
 
 
 

 
 
1914년 극장 봉래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일본인들을 위한 종합 오락장 역할을 했던 통영 봉래극장
 
 
 

 
 
1935년 문 열어 70여 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광주극장
 
 
 
 
1960년대는 아직 TV가 일반화되기 전이었다. 1964년에 TBC-TV가 개국했지만 서울과 부산에서만 볼 수 있었고 1969년에 MBC-TV가 개국했지만 지방방송망은 1971년에야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적어도 서울과 부산을 제외한 지방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연예인들의 얼굴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1955년 광주 충장로 2가
 
 
 



 




 
 
 
1960년대는 대중음악보다는 영화가 먼저 전성기를 이루었고 1960년대 중반기부터 대중음악도 영화 못지않은 전성기를 누리면서 수많은 대중연예스타들이 사랑을 받았다. 이런 대중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기획된 무대가 극장쇼였다. 당시에 가장 인기있는 가수나 영화배우 2명 정도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사이를 B급가수, 코미디언, 섹시한 무희의 춤을 곁들인 일종의 버라이어티쇼의 형태였다.
 
 
 
 


 
1975.8.26
 
 
 
입장료는 최소한 40원. 영화상영시에는 20원 균일이던 삼류영화관인데도 쇼의 경우는 40원 이상을 받고 그래도 손님은 만원. 장내에 들어가보면 지정석은 아예 무시되어 있으니 빈대떡 포개듯 관객들은 꽉 차 있다. 휘황찬란한 오색조명이 울긋불긋한 무대를 비추면 인기가수가 등장 미친듯이 노래를 부른다. 다혈질인 어느 가수는 양복저고리를 벗어 팽개치고 어느 가희는 광인처럼 몸을 흔들고 비비꼰다. 하아드 아이스크림을 빨던 앞줄의 소년들이 기성을 발하며 무대로 뛰어오른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십대의 소년소녀들이다. 코미디가 시작된다. 일류래도 좋고 이류, 삼류래도 좋다. 객석 앞줄의 여드름박이 소년들의 귀에 익은 코미디언들이라면 우선 무대에 나서기 무섭게 박수갈채를 받는다.
「쇼오」 『명랑』 1966년9월호
 
 
 
 
신인가수들은 박수부대 혹은 사꾸라(주로 친구들)를 동원해서 박수치고 함성을 지르도록 하지만 요사이에는 별로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구경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똘마니(대개 20세전후)들은 꼭 끼인다. 5~6명 혹은 때때로 10여명씩 끼어 아침부터 밤10시 지나도록 하루종일 맨 앞에 앉아 소리지르고 구경하곤 한다. 그게 제일 골치라서 춤추고 심하게 떠드는 친구는 임검이 단속하기도 한다.
「쇼공연의 무대 뒤」, 주간한국  65.9.12

 
 
 


 
 
 
위의 글은 전형적인 지방 삼류극장에서의 극장쇼 풍경을 잘 보여준다. 역시 가장 최신유행음악에 동물적인 반응을 보이는 쪽은 젊은이들이었고 이런 과격한 장면은 물론 TV를 통해서도 잘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극장쇼의 매력이었다. 이런 극장쇼는 일류극장에서는 잘 하지 않았고 한일극장, 노벨극장, 천일극장, 화양극장, 동양극장, 성남극장, 시대극장, 연흥극장, 제일극장, 신영극장, 천호극장, 미도극장, 서울극장, 우미관 등 2류극장이나 변두리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하지만 1961년에 완공된 시민회관은 극장쇼중에서도 가장 전문적인 흥행사가 가장 호화 출연진을 섭외하여 극장쇼의 결정판을 보여주었다.
 
 
극장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날짜가 좋아야 했다. 휴일이나 명절이어야 하며, 가능한 한 그 날짜를 중심으로 해서 정부행사가 없어야 하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주변에 다른 더 좋은 공연이 없어야 했다. 흥행업자는 흥행계획을 세우면 얼마간의 돈을 준비해가지고 사업부에게 지시를 내린다. 사업부는 다방에 임시 연락처를 두고 출연시킬 사람들을 산정, 계획을 한다.
 
스카라극장 맞은편에 줄지어서 있는 다방들은 연예인의 집합처였다. M다방은 주로 서울파, D다방은 지방파가 애용했다. 흥행업자는 물론 쇼무대에 서는 가수, 코미디언, 댄서들을 항시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크게 공연을 할 때는 한두 번쯤 연습을 갖지만 지방인 경우는 지정된 시간에 모여 기차를 타고 공연지로 떠나면 그 뿐이다.
 
쇼흥행업자는 개막 직전에 고사를 지냈다. 명태 몇 마리와 막걸리 한 되로 드럼이 놓인 자리에 제사상을 차린다. 개관 첫 무대의 막이 오를 때 극장주와 쇼흥행주는 돈다발을 내야 한다. 상량식을 할 때와 비슷하다. 일류극장일 경우는 적어도 1만원, 삼류극장이라도 최소 3천원은 있어야 막이 올라가게 마련이다. 다른 곳과는 달리 쇼가 공연되는 극장에는 산짐승을 데리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금기가 있었다.

쇼가 시작되면 극장 문앞에는 극장측과 흥행주측 두 사람의 수표계(기도)가 서있게 된다. 수표계 두 사람은 우선 짜배기(공짜배기)를 막아내는데 별 궁리를 다 써야한다. 극장과 단체는 대개 4ㆍ6제로 수입을 나누었다. 제작자는 입구에서 수입을 챙기며 흥행의 성패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그 사이 가장 바빠지는 사람은 사회자이다.
 
사회자는 무대와 분장실을 바쁘게 오가면서 공연진행의 스케줄을 제대로 진행시켜야한다. 출연자 모두가 행동을 같이 하는 지방공연인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서울의 경우는 출연자들이 다른 업소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을 때는 피가 마를 지경이다. 그 외에도 광적인 팬들의 면회를 통제해야 하고, 가수주변손님들을 입장시켜야하고, 분장실에서는 가수간에 벌어지는 싸움도 말려야 하며, 분장실에 출입하는 좀도둑까지 감시해야 한다.
 
출연자들이 대기하는 분장실은 탈의실이 따로 없어서 보자기로 가리고 옷을 갈아입곤 했다. 출연자들에겐 야참비가 잔돈으로 지급되었는데 그 돈으로 대기하는 동안 나이롱뻥이라는 화투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피날레에는 모두가 무대로 나가는데 이때가 좀도둑을 가장 조심해야 할 때다.
 
서울에서 벌이는 극장쇼보다는 한두 달씩 지방을 순회하며 벌이는 극장쇼는 모든 출연자가 행동을 같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낭만도 있었다. 아래의 글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1963년1월 무랑루즈 쇼단이 기획한 ‘신성일 엄앵란쇼‘는 최희준, 현미, 이봉조, 이미자를 캐스팅하고 이 부부에게 10일 출연료 140만원을 선불하고 서울에서 공연을 한 다음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부산에서 제일극장과 태화극장을 겹치기 공연 중 이미자는 목이 아파 제일극장 공연이 끝나고 태화극장 공연 사이시간에 병원에 갔다가 시간을 잘 못 보아 공연을 까먹고 말았다. 이미자를 평소 친누이처럼 귀여워하던 김단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빰을 때렸다. 이미자는 거품을 물고 쓰러져 냉수를 먹이고 몸을 주무르는 소동을 벌이고 나중에 정신을 차렸으나 한마디의 항의도 못했다.
 
 
 
 

 
 
 
 
1963년 2월 21인의 백합회는 당시 부회장이었던 이대엽의 계획으로 주난지, 박노식, 윤일로, 이경희, 지용남 등을 출연시켜 원주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장으로 이동할 때 폭설로 길이 막혀 2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빗발치는 항의를 수습하기 위해 이대엽은 무대위로 뛰어올라가 관객석에 대고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노라고. 그러자 객석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나이답게 사죄한 이대엽은 이로 인하여 인기가 충천하여 다음 공연은 객석이 입추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1975.8.26  미아리극장
 
 
 
 
1960, 1961년의 일로 백난아가 쇼단을 구성하여 지방공연을 다닐 때 영주에서 공연이 제대로 되지 않아 극장에서 나온 부금이 겨우 5천원밖에 되지 않았다. 30명의 단원의 차비도 되지 않는 돈으로 여관에 투숙하고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조명기구, 마이크, 앰프 등을 5일 한으로 전당잡히고 겨우 서울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쇼오쇼오에 얽힌 아라비안나이트」, 명랑  66년1월호
 
 
 
 


 
 
이러한 극장쇼의 전신은 일제강점기에 붐을 이루었던 악극단이라 할 수 있다. KPK 백조, 도미도, 라미라 악극단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한 단체에 인기 연예인이 전속으로 속해있었고 수십명의 단원이 함께 숙식을 하며 전국을 순례하는 형태여서 극의 완성도가 높았고 공연시장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서 극장쇼는 두개의 큰 라이벌의 도전에 직면했다.
 
 
 
 
첫 번째가 영화의 막강한 도전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영화가 전성기를 이루자 이전까지 극장쇼의 전용무대였던 극장들이 순순히 극장을 빌려주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대관료가 상승하게 되었다. 두 번째의 도전은 방송국들이 경쟁적으로 벌인 무료공개방송이었다. 방송국을 홍보하면서도 프로의 내용을 생동감있게 채울 수 있는 공개방송은 연예인들이 전국적 시청자들에게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이니만큼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공개방송의 출연료는 극장쇼의 1/5에 불과했지만 출연을 못해서 안달이었다. 따라서 극장쇼 흥행업자들은 경쟁적으로 더 크고 화려한 쇼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무대가 1961년에 개관한 시민회관이었다.
 
 
 
 





 
 
 
1961.10.25  시민회관 공사가 개관을 앞두고 마무리중이다.
 
 


 
 
 
1962.11.7 시민회관 1주년 기념공연
 
 


 
 
 
1962년 시민회관에서 본 세종로 야경
 
 
 
 
시민회관은 분장실과 화장실도 제대로 없었던 극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대 또한 이동식을 갖추고 있어서 다양한 무대가 가능했고 객석이 3천석이니 대형극장쇼를 벌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재정이 열악한 흥행업자들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가져왔다. 너도나도 인기 연예인을 총집결한 대형의 ‘올스타쇼’를 기획하니까 TV나 업소출연에 바쁜 콧대높은 연예인들을 데리고 연습을 충실히 할 수가 없었다. 유명한 스타가 여러개의 쇼에 겹치기 출연을 하게 되니 관객은 식상하게 되고 자연히 몇 개를 빼고는 성공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유행이 시민회관에 그치지 않고 변두리 극장에까지 번져나갔다. 그러다보니 과거의 악극단처럼 연예인들을 전속으로 둘 수도 없는 형편에 방송과 영화로 눈높이가 높아진 관객의 수준에 맞추려니 제작단가는 상승하는데 쇼의 질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1972년 시민회관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극장쇼는 가장 큰 무대를 잃어버리고 수준과 규모도 크게 하락하여 지방과 변두리극장에서 벌이는 삼류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