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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의 실제 사진들

털보아찌 2008. 12. 3. 16:40

실미도 사건의 실제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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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실미도부대 교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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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유한양행앞 실미도부대 탈취차량


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684부대' 라고 불렀다. 

 
특수부대 창설은 68년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던 1·21사태에서 비롯되는데 이 사건에 분노한 박정희가 그 보복 조치 로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며 부대 인원도 김신조 특공대 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되었고 훈련요원과 동일한 수의 기간요원들이 있었다.

모든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대장과 직접 교육병들을 담당하고 같이 행동하는 소대장, 통신병, 의무병, 보급병 등이 있었다.

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 철희(후에 이철히 장영자 사건의 조범이였죠)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그들은 혹독한 지옥훈련 3개월만에 북한 주석궁을 침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다.

그러나 실미도 특수부대가 창설된지 3년 4개월만에 북파지연과 월급/대우에대한 불만 이 폭발하게된다.

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 km 떨어진 해발 80m, 2제곱 km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으로 중앙정보부가 당시 북파 특수부대를 훈련시킬 최적의 장소로 이 곳을 지적했다.

그들은 3년4개월동안 체포되면 죽는다는 교육을 하루에도 몇번씩 받았다. 조국 통일 을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북한 침투훈련을 위해 위성사진을 본따 북한 지형의 모형(사판)을 만들어 훈련했다. 독도법 호신술 산악훈련 폭파기술 등을 배웠다. 기간요원과 훈련병 모두 처음에는 사 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김신조부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각오로 산악구보를 하더라도 그들보다 1초라도 더 빨리 달렸다. 훈련중에 동료 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의 기량은 최고 에 달했다. 목숨을 건 훈련 3개월만에 목표물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그들의 사격실력은 백발 백중이었다.

훈련요원과 기간요원이 함께 먹고 자면서 똑같이 생활했다.

당초에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면서 상부로부터 보급과 지원이 줄어들었고 실미도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전명령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참아온 석달. 그러나 예정되었던 68년 8월에 북한침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되고 만다. 그이후 지옥같은 훈련을 3년이나 견디어 내면서 작전 명령을 기다려 왔지만 그들에게 단한번도 북파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실미도 난동사건 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당시 실미도 밖의 상황은 남북 화해분위기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은 684 부대를 만든 장본인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고 실미도 처리문제는 계속 미루어진다. 국제 데탕트의 영향(미 중의 핑퐁외교등...)을 받아 남북한 역시 대화노선으로 나간다. 이후락은 마침내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고 남북회담으로 이어진다.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한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끔찍한 최후의 날인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을 위한 훈련병들의 행동개시와 함께 실미도는 삽시간에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다. 특수훈련을 받은 훈련병들이 일당백의 기량으로 기간병을 습격한다.

24명의 기간요원중 교육대장이던 준위등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피하려다 익사 하였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김방일 소대장등 모두 6명. 그리고 훈련병들은 인근섬 무의도에 들어가 배를 타고 낮 12시 30분경 3년 4개월간 갇 혀 있던 실미도를 빠져 나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다. 12시 53분 송도외곽에 서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육군 24명과 총격전을 벌 인다. 그들이 타고가던 버스의 바퀴가 펑크나자 마주오던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한다.

오후 2시 15분경 운전기사가 탈출하자 실미도 훈련병이 직접 차를 몬다. 대방동 로터리 유한양행앞에서 그들이 몰던 버스가 가로수에 받혀 멈춘다. 그리고는 수류탄 자폭 으로 최후를 맞는다. 생존자 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고 이사건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영원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 사건발생 3일후 당시 국방장관이 전격 사표를 냄으로써 이사건은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이 종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