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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의 역사
(사진 왼쪽)
주간경향. 표지 모델은 배우 이승연씨다. 잡지는 그 시절의 자화상이다.
(사진 오른쪽) 브로마이드 화보, 햇병아리 연예인들은 이런 사진 실리는 게 꿈이었다. 예전엔 군인들의 철모 안에 많이 들어있던 사진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미친 듯 어떤 일에 몰두할 때가 있었다. 그 시작은 '만화책'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만화책에 빠져 살았다. 동네에 있는 만화 가게는 다 내 놀이터였다. 신간이 나오면 가장 먼저 봐야 직성이 풀릴 정도였다.
처음엔 돈을 지불하고 봤지만 나중엔 훑어보는 척하며 선 채로 다 봤다. 한 권을 다 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일 분이면 족했다. 고수가 된 후에는 돈을 내고 보는 만화책보다 공짜로 보는 게 더 많았다. 물론 자세히 봐야 할 만화가 있으면 집에 빌려와 몇 번이고 봤다.
만화책은 '읽기' 개념보다 '본다'는 개념이 강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내로 태어나 다섯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말을 제대로 실천한 셈이기도 했다.
당시 만화 가게는 만화책뿐 아니라 무협지나 잡지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는 만화책이 점차 시들해졌다. 함께 만화 가게를 드나들던 친구들 중 몇은 무협지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나는 잡지 쪽을 선택했다. 잡지는 손에 잡기만 해도 몸부터 후끈 달아오르는 매력이 있어 좋았다.
흔히 말하는 사춘기 시절은 궁금할 게 많은 나이였다. 세상살이에 대한 고민보다 요상하게 변하는 몸의 구조와 근원을 알 수 없는 콩닥거림이 고민이라면 고민의 대상이었다.
당시에 만난 잡지는 <주간경향>과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였다. 물론 <학원> 같은 고품격의 잡지도 섭렵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학원>지에서 '이가 빠진 동그라미'를 처음 읽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다.
누가 뭐래도 잡지는 그 시절 내 영혼을 살찌우는 비타민과 같았다. 셰익스피어의 전집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보다 영양가가 많고 재미있었다.
(사진 왼쪽)
선데이서울 표지. 늘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진 오른쪽)
주간경향 표지.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던 잡지, 그 시대를 대변했다. <정선 추억의 박물관 소장품>
나의 보물창고이며 가정교사...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잡지엔 내가 궁금해하던 것들이 가득했다. 당시의 잡지는 내게 있어 보물창고였으며, 가정교사와 다름없었다. 더구나 상상력까지 향상시켜주었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였다.
여성의 브래지어 한번 구경하지 못하고 사춘기를 맞은 탓에 어여쁜 여자의 몸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몽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누드 사진이나 수영복을 입은 탤런트의 사진이 암거래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대중가요 책이나 잡지 뒷면에 나오는 펜팔코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우리는 맘에 드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에게 편지를 썼으며 도시 여학생과 달콤한 연애도 꿈꾸었다.
한 친구는 멋진 가명을 만들어 펜팔코너에 내기도 했다. 당시 유행했던 가명은 '강준' 또는 '강민' 이런 식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친구에게 날아드는 편지를 돌려 읽었으며, 대신 답장을 써주기도 했다.
고교시절엔 단행본 시리즈로 나오던 '사랑의 체험수기'를 정독하면서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또 잡지에 나오는 체험수기인 '사랑의 십자로'나 '사랑의 메아리'를 탐독했으며, 수기의 사연처럼 우연히 다가오는 사랑이 내게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이 있다.
수기의 내용이 사실이던 지어낸 것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좋을 때라 모든 걸 소화할 수 있는 나이였으며, 그런 사연이 내게도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살았다. 하여 기차나 버스를 탈 때면 일부러 옆자리를 비워두고 여학생이 앉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으리라'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친구는 여자 뒤에서 표를 사거나 뒤를 따라붙기도 했다. 그 일이 어쩌다 성공이라도 하면 친구의 연애담을 듣기 위해 호빵이라도 입에 물려주어야 했다.
집에 소장하고 있는 잡지 <주간경향>에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사연이 나온다. 조금만 소개하자.
옆 자리에 한 젊은 남자가 앉았다. 차림새가 세련되지 못한 데 비해 핸섬한 얼굴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시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슬픈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느낌이었다.
버스가 군위읍을 벗어날 즈음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말을 굴곡없는 톤으로 독백하듯 꺼냈다.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거지만 수렁에 한번 다리가 빠지면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든 것 같잖아요? 아무리 자기 사진을 독려해도 인생은 자기 뜻과는 무관한 것이 너무도 많기도 하고…."
마치 인생의 달관자가 된 것처럼,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난 시종 미소로 대신했다.
- <주간경향> 1251호(1993년 5월 9일 발행) 독자의 체험수기 '사랑의 메아리' 중에서
지금 보면 문맥도 엉성하고 조금은 유치하달 수 있는 내용이지만, 당시만 해도 시간을 죽이며 상상력을 극대화 시키기에는 그만이었다.
어떤 희곡작가는 '사랑의 십자로'로 문단에 데뷔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실제 그는 고교 시절 '사랑의 체험수기'에 투고하여 실린 적이 있다고 했다.
1969년에 발행된 주간경향, 표지 모델은 당시 인기를 누리던 홍세미씨. 서울시립대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이다.
주간지의 역사는 1918년 9월에 창간된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발행된 주간지는 대중지가 아닌 순수문예지였으며, 1955년에 창간된 <주간희망(週刊希望)>이 비로소 대중과 함께하는 주간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68년 <선데이서울>의 등장으로 주간지의 역사가 다시 한번 바뀌게 된다. 그해 9월 22일 창간된 <선데이서울>은 1992년 12월 통권 119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당시 가격은 20원이었으며, 폐간될 당시의 가격은 2천원이었다.
뒤이어 발행된 <주간경향>은 1968년 11월 17일 창간하여 1995년 6월 1일 136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당대의 스타들이 표지를 장식하던 잡지는 패션이나 유행, 사회상 등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그 시절의 거울과 다름없다. 햇병아리 연예인은 <선데이서울>이나 <주간경향>에 얼굴을 비추어야만 연예인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당시 발행된 잡지들의 기사 제목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호텔에서 밀회를 즐기던 국회의원이 구설수에 오르는가 하면, 인기 여배우가 마약 파티를 즐겼다는 내용과 남편을 때리고 구속된 여의사의 기사가 세간의 입을 바쁘게 만들었다.
청소년에게 '필독서' 대중잡지... 이젠 추억으로만 존재
한때 대중잡지는 신군부 정권의 3S 정책에 힙입어 날개를 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대중잡지도 화려한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젠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대중잡지는 너무도 대중적이다 보니 남아있는 책자가 없다. 그로 인해 그렇게 흔하던 잡지가 요즘엔 박물관에 소장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청소년에게 '필독서'였던 대중잡지들, 하지만 일부 지식인들에겐 지나친 성적 표현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중잡지는 나른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하루의 긴장을 푸는 포장마차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유로 대중문화의 표상이었던 대중잡지도 우리가 살아온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불 속에서 몰래 보던 잡지가 박물관에 유물로서 떳떳하게 소장되는 아이러니를 겪어야 하는 요즘 '내 마음의 박물관'에 있는 지난 추억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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