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사회와 문화 ----------------
전국으로 번진 새마을운동
1970년대 어디를 가든지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좋아졌네! 좋아졌어]
[새벽종이 울렸네]의 노래가 들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가뭄대책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처음 구상을 밝힌 새마을 운동이
전국을 휩쓸며 정치.경제.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민부흥운동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에 힘입어 고질적인 가낭의 병폐에서 벗어나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반면,
정치적인 억압의 눈가리개용이라는 비난과 '물질만능주의'의 폐해를 확산시켰다.
사진은 효제국민학교 1천2백여 어린이들이 거리청소에 나서는 모습이다.
연예인 새마을 촉진대회
1977년 3월 10일 서울시민회관 별관에서 380명의 연예인이 모여,
연예계의 퇴폐풍조를 일소하겠다고 다짐한 연예인 새마을 촉진대회의 장면이다. 구봉서.배삼룡.서영춘 등의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연예계 퇴폐풍조 일소를 통해 도시 새마을운동에 앞장선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 연예인들을 동원해 새마을운동의 분위기를 띄웠던 것이다.
도박추방에 불타는 화투
새마을 운동은 일상생활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도박 추방의 형태로 나타났다.
사진은 대학요식업 중앙회와 숙박업협회가 [여관 및 접객업소에서 화투놀이을 하지 말자]는 구호 아래 도박 추방운동을 벌이는 모습이다.
1973년 6월 15일에 각 업소에서 거두어들이 1만 2천벌의 화투가 한강 백사장에서 태워졌다.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 축구대회]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 축구대회]는
1972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최된 국제규모의 대회이다.
박정희군사정권은 스포츠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호도하였으며, 여기에 일인 독재의
허울을 덮어세워 이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대 말레이지아전에서 5:1로 크게 이겼는데, 사진은 한국의 박주덕의 슛을 말레이지아 골키퍼가 막아내는 장면이다.
한국은 첫대회의 결승전에서 버어마와 0:0으로 비겨 공동우승을 하였다.
이 대회는 1979년 박대통령의 시해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호스티스영화 붐
1974년 [별들의 고향]을 시작으로 호스티스 영화가 붐을 이룬다.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도시 주변부의 소외된 삶이나 억압된
정치사회적 상황을 표현하려는 짙은 사회성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들은 일정한 수준과 내용을 보이긴 했으나, 영화적인 완성도나 흥행면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유신치하 군사독재의 억압적 정치상황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기에는 당시에 억압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사진은 호스티스 영화의 하나인 [영자의 전성시대]로,
지금은 중년인 송재호의 앳띤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이틴영화의 인기
이런 와중에서 등장한 것이 10대 하이틴 영화와 희극 아니면 청춘 멜로와 희극의 중간 형태로 등장한 얄팍한 감상주의 희극 영화들이다.
[진짜 진짜 잊지마], [진찌 진짜 미안해], [고교 얄개]의 하이틴 영화들은 값싼 제작비와
검열에 걸리지 않는 장점 때문에 선호되었고,
[병태와 영자], [아니 벌써] 등의 희극 영화들은 저급한 웃음으로 관객들을 끌어모으려
했으나 실패한 경우들이다. 사진은 고교 얄개의 한 장면이다.
통기타 문화
70년대 대중음악계의 중요한 특징은 포크송의 유행이라 할 수 있다.
낡은 청바지, 장발,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발흥으로 널리 퍼져갔다.
1970년대 초반 양희은, 김민기, 이정은 등이 등장하여 음악감상실이 밀집한 대학가와
도심가를 통해 커다란 물결을 이룬다.
대부분 고학력자들로 구성된 포크 가수들은 자작곡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이전까지
몇몇 가수에게만 귀하게 쓰여지던 '학사가수'라는 단어도 빛을 잃어갔다.
60년대 활동하던 가수들이 인기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새롭게 '다운타운형' '방송국형'
'댄스가수'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나훈아,남진의 인기
새로이 등장한 포크 송에 대해 트로트의 부흥에 기여한 대표적인 가수가
나훈아, 남진 등이다.
이들의 노래는 모두 사랑, 이별, 그림움, 미움 등의 감정을 다양하고도 직접적인 어법으로
묘사하여, 오늘날까지도 계속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진은 1972년 6월4일 밤 11시경 서울 시민회관 공연 도중 젊은 팬으로 부터 피습을 당한 장면이다. 당시 과열된 인기의 한면을 보여준다.
TV 드라마 광고
TV CF
70년대 초반 대중들은 텔레비젼 연속극 [아씨]와 [여로] 앞에서
눈과 귀를 빼앗긴 채 울고 있었다.
1971년 겨우 62만대에 불과하던 텔레비젼 수상기의 보급대수는 1975년 2백만대,
1980년 660만대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대중문화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군사정권은 정책 홍보의 수단으로 텔레비젼 방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61년 KBS 텔레비젼을 개국시키고, 1969년에는 '전자산업육성법'을 공포해 텔레비젼
수상기의 보급을 적극 장려한 결과이다.
우리나라의 텔레비젼 방송은 1956년 6월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 4번째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당시 MBC 일일연속극의 신문광고이다.
일일연속극은 1970년을 기점으로 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 붐은 1970년 3월 시작한 TBC의 [아씨]에서 비롯되었다.
1972년 세 방송국은 매일 제작 방송하는 일일연속극 편수가
13편에 이를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한편 T.V.방송이 보급됨에 따라 상업광고가 본격화되었다.
KBS는 1969년 상업광고 방송을 그만 두었다가 1981년에 다시 재개하였으며,
민간상업방송인 MBC는 개국과 함께 계속 광고방송을 하였다.
1973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텔레비젼의 프로그램 중간에 하는 광고는 금지되어졌다.
어린이대공원
서울시 11억원을 들여 서울 성동구 22만평의 대지 위에 마련한 [어린이 대공원]이다.
1974년 5월 5일 제51회 어린이 날에 개장하였는데, 첫날 30만의 인파가 붐볐다.
주말에 서울시민들이 자녀들과 함께 즐기는 대표적인 놀이시설이 되었다.
젊은이들의 환락 고고장
대학가 축제댄스
지나친 사회규제와 정치적 억압상황은 젊은이들의 답답한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거의 본능적으로 부추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