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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가요계의 여왕들

털보아찌 2009. 2. 22. 11:32
1961년 - 박재란



50년대 후반 가요계의 여왕은 단연 박재란이었다.
그 조금 전에 허스키하면서도 클래식한 창법의 송민도가
절정에서 박재란에게 바통터치를 한 것이다.
박재란의 장점은 친근함과 다양함이었다.
재기발랄한 미모와 꾀꼬리라 불리운 맑은 미성으로
행복은 라이라이, 푸른 날개, 둘이서 트위스트를, 맹꽁이 타령 등을
가볍고 발랄하면서도 귀엽게 불러 인기를 독차지햇다.
거기다가 박재란은 못부르는 장르의 노래가 없었다.
스윙, 트롯트, 트위스트, 민요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히트곡이 나왔던 것이다.
게다가 대중에게 각인된 그녀의 이미지는
순정파 미녀 바로 그것이었다.
부담없는 그녀의 이미지는 어린 아이서 부터 노인층까지
폭넓은 인기가도를 구가하는데 큰 몫을 했다.
그녀의 전매특허 같은 올린머리에 타이트 스커트 차림 모습은 지금봐도
날렵하고 상큼하다.
이를테면 비디오형 가수의 효시가 바로 박재란이었던 듯 하다.
그렇다고 결코 가창력이 없었던 것은 아닌 그녀..
60년대 초반의 가요계는 이 아름답고 싱그럽고 사랑스러운
미녀가수가 화려하게 열면서 시작되었다.


1962년 - 한명숙, 현미, 이금희



웨스턴 조의 경쾌한 노란셔츠 입은 사나이가 히트하면서
우리 나라 여성 허스키가 선풍을 일으킨 것이 바로 이때이다.
당시 미팔군 무대에서 팝송을 즐겨 부르던 일군의 가수들이
대중가요계로 나온 것도 이즈음인데
그 대표주자가 한명숙과 현미, 이금희 등이다.
이들 셋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인기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먼저 각광을 받은 가수가 한명숙이었다.
서글서글하고 귀여운 인상에 글래러러스한 몸매를 지닌
이 가수는 그 이전의 어느 여가수도 갖지못한 쉰 목소리와 서구적인 창법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 정점이 말하자면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
이 노래는 동남아 각지에도 퍼져 나가 요즘 말로하면 한류의
원조로 인기를 끌었다. 1966년 서울에서 열린 아세아 영화제에서
한명숙이 이 노래를 부르자 각국의 여배우들이 합창으로 따라 불렀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뒤이어 각광받은 가수는 텐더보이스 ( 바이브레이션이 강한 떨리는 목소리 ) 현미.
현미 역시 허스키의 계보에 속하지만 허스키라 해서 성량이 부족하지않은
탁 트인 발성으로 시원스런 스탠다드형의 가요를 많이 불렀는데
그중 백미가 밤안개와 신성일 엄앵란 영화의 주제가들이다.
남편 이봉조와 컴비로 쏟아내듯 만들어낸 청춘영화 주제가들은
그야말로 주옥같은 60년대 히트 레퍼터리들이다.
떠날 때는 말없이, 애인, 바람, 총각김치 등등...
1962년도의 세 여왕들 중에서 히트곡이 가장 많은 저력의 가수가 그녀였다.

이어서 각광을 나눠가진 가수는 미스 다이너마이트 이금희.
이 가수 역시 허스키이지만 현미와 한명숙이 고고풍이나 스탠다드 풍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면 이금희는 댄스곡을 불렀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수잇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절로 흥이 겨워 같이 춤을 추고싶은 충동을 일으켰다니
어찌보면 60년대 댄싱퀸은 그녀가 아닐지.
또한 그녀의 노래는 키다리 미스터김, 인상파 미스터김, 다이너마이트..등등
코믹하고 풍자적이며 현실적인 가사가 많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겠다.


1963년 - 패티김



데뷔 때 부터 도도했던 가수 패티김.
미8군 출신의 대형 가수로 팝송 번안곡으로 득세한 유일한 가수가 그녀라 하겟다.
나중에 길옥윤과 컴비로 대중가요도 많이 히트시키지만
그녀는 아주 드물게 팝송 번안곡으로 인기를 얻은 케이스다.
파드레, 틸 등이 바로 그런 노래들.
한명숙 현미 등도 같은 서구적인 창법이었으나
패티김이 다른 점이 있었다면 창과 판소리로 목소리를 다듬은 바람에
한없이 서구적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적인 감흥을 일으켜
대중 어필이 더 강렬했다는 점 이랄까.
노래의 완성도와 무대에서 완벽하고 싶다는 열망은
그야말로 프로페셔널해서 지금도 귀감이 되는 장점이다.


1964년 - 이미자



드디어 이미자가 등장한다.
데뷔는 1961년이지만 그녀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해에 나온
영화 주제가 동백 아가씨 때문이었던 것.
그 이전 여가수들의 장점들..
예를 들면 박재란의 다정함, 황정자의 애조, 현미 한명숙의 시원스러움, 등등을
곱고 슬픈 목소리 하나로 단숨에 무위로 돌린 진짜 여왕의 탄생이 그녀였다.
임신 팔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숨찬 듯 부른 그 노래 동백 아가씨는
비단실 같이 곱고 청승맞은 음색과 섹시한 목소리로 한없이 애조 띄게 불러
당시 개발도상국의 고단한 와중에 있던
전국민의 심상을 위로하고도 남았다.
그녀의 전성기는 이 후 10년도 더 넘게 지속된다.
대중들은 이미자를 선택했다.


단연코.... 1965년 - 성재희



거칠고 둔탁할 만큼 강렬한 허스키 성재희의 등장은
말 그대로 신선했다.
늘씬한 몸매에 세련된 미모, 거기다 허스키 음성에 걸맞는
매력적인 노래 보슬비오는 거리를 들고나온 성재희는
이 노래 한 곡으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었고 허스키의 왕녀란
별명을 얻었다.
그 녀 이전에도 송민도, 한명숙, 현미 같은 허스키 가수들이 있었지만
비현실적일만큼 거친 허스키는 그 녀가 처음.
남성의 목소리로 들릴만큼 강한 허스키에
색기 넘치는 미모가 단연 인기의 비결이었던 가수.
그러나 그 녀는 미모에 걸맞는( ? ) 다양한 스캔들과
혜성 같이 등장한 천재 가수 문주란에게 가려져
단명한 채 부자집 마나님이 되는 것과 함께 인기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드디어.... 1966년 - 문주란



마침내 이윽고 기어이..
문주란의 등장이다.

그 녀 이전에도 소녀 가수들은 있었지만
창법과 필링에서 성인 가수들의 흉내에 불과한 점이 있었다면.
문주란의 장점은 경력 쟁쟁한 대선배 가수들 보다
더 능숙하고 깊은 감정 처리와 무대 매너다..
당시 그 녀가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도저히 16세 소녀의 목소리와 창법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깊이와 우수를 지녔던 것이다.
거기다 목소리의 특징은 윤기 한톨 없는 낮고 애잔한 저음의 허스키.
전무후무한 개성의 그녀의 등장은 대중들에게는 신선한 즐거움이..
선배 동료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그 녀의 또 한가지 장점은 고급스러움.
역대 여자 가수들중 제목에 한자가 들어간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른 가수가 문주란이다.
이건 조금 우스운 비유라 할지 모르지만
이미자 노래의 제목이 한탄조의 그리움은 가슴마다, 한번준 마음인데, 님이라 부르리까.. 등등
누구나 이해 가능한 서술형의 제목인 데 비해
문주란은 낙조, 타인들, 초우, 순정, 고백, 애상..등등 한자어로 만들어진 제목이 태반이다.
그 것만으로도 알수 있는건 60년대의 최고 여왕 이미자가 서민들에게 위안을 준
대중적인 여왕이었다면
문주란은 독특한 저음과 허스키, 그리고 깊은 감정과 식자층 혹은 마니아층에게
깊은 감동을 준 고급스러움이 있어서 컬트적인 여왕이었다.
문주란은 그런 매혹으로 이후에도 이미자와 공존하며
인기가도를 질주했다.
문주란의 등장은 여타 허스키 가수들을 음지로 내몰았는데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성재희, 한명숙, 현미 등이다


1967년 - 정훈희



문주란의 대대적인 데뷔 이후..
가요계에는 어린 소녀가수들의 데뷔가 줄을 이었다.
우후죽순 격의 신인 가수 데뷔 중에 유독 눈에 띄인 데뷔는 정훈희였다.
문주란 처럼 부산 엠비시 콩쿨에서 1등 한 후 서울로 픽업되어
이봉조의 야심작인 영화 주제가 안개를 불렀는데
판이 정식으로 나오기도 전에 테이프만 방송국에 돌렸는데도
대대적인 히트가도가 시작되었다.
광물성의 광택을 지닌 어린아이같이 청초한 음색.
고음으로 올라갈 수록 콧소리가 강해지는 로리타적 섹스어필이 그녀의 장점이었는데
1966년의 신인상을 문주란이 독점했다면
1967년의 신인상은 정훈희가 독점했다.


1968년 - 김상희



고대 법대 출신의 개성적인 용모를 지닌
최순강이 집안어른들의 눈을 피해 가수가 된 후
몇 곡의 발랄한 청춘송을 불렀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수더분한 음색의 장점을 살려 코믹송으로 길을 돌렸는데
그런 일련의 노래들이 반응이 왔다.
대머리총각, 울산큰애기, 단벌신사...
여가수중 최초의 명문대 학사 가수라는 타이틀과
그녀만의 수더분한 개성이 맞물려
인기 롱런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의 승승장구에는 그리 특이할 것 없는 음성이지만
늘 변화를 추구했던 그녀의 노력이 큰 효과를 봤다.
그녀는 특장점이라고 봤던 코믹송 말고도 소울 사이키 트롯까지 장르를 넓혔던 것이다.


1969년 - 최정자



비둘기 시스터즈, 아리랑 시스터즈라는
알려지지않았던 중창팀에서 얌전하게 노래를 하던 최정자는
팔방미인 작곡가 황우루를 만나면서 인기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최정자를 한 여인으로서 사랑했던 황우루가
그녀의 청순하면서 깨끗한 개성을 알아보고 그녀의 매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민요조 대중가요들을 부르게 했던 것이다.
초가 삼간, 처녀농군, 매화타령, 창부타령, 일편단심.. 등의
히트곡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지며 그녀는 민요의 여왕이란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녀의 민요는
김세레나의 관능미, 조미미의 너그러움, 김부자의 섹시한 콧소리의 매력과는
전혀 다른 깨끗하고 여성적인 매력이 넘쳐서 돋보였다.
한 여인으로서도 귀감이 되는 현숙한 성품도 그녀의 매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