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공간 ★/감동의글 이야기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털보아찌 2010. 5. 25. 23:56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아버지가 남기신 빚을 갚기 위해 서울로 떠나신 후, 다섯 살이던 저와 세 살이던 남동생은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겠지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할머니 손에 맡겨지고 1년이 지난, 여섯 살의 봄입니다. 불행히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지금까지도 제 가슴 속에 아픈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날, 도시 생활을 하고 있던 친척들이 저와 제 동생 문제로 할머니 댁을 찾았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할머니와 친척들 간에 언성을 높이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안 된다는 말씀만 반복하셨고, 친척들은 사는 게 힘들어서 도와 줄 수 없다는 말만 거듭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저와 제 동생에게 새 옷을 입혀 주고, 새 신을 신겨 주며, 좋은 곳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울먹이시던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저희 남매 손을 이끌고 문밖을 나섰습니다. 친척들 누구하나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다르셨습니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저희 남매를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안 된다. 절대 못 보낸다. 고아원에도, 아들 없는 집에도, 나는 못 보낸다. 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들 못 보낸다. 니들 헌티 10원 한 푼 도와 달라구 안 헐라니까 보내지 마라. 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할머니의 눈물이 지금의 저희 남매를 있게 해 준 것입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들 없는 집에 보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친척들께 약속하신 대로 10원 한 푼 받지 않고 저희 남매를 기르셨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시며, 받아오신 품삯으로 생활을 꾸려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저희 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셔야 했는지, 스스로 얼마나 억척스러워지셔야 했는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그저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새 옷 한 벌 없이 남의 옷만 얻어 입는 것이 불만이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학용품을 넉넉하게 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마음 놓고 과자 한번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소풍에 돈 한 푼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운동회 때 할머니랑 함께 달리는 것이 불만이었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불쌍한 아이 취급받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이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새 옷 한 벌 사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러 다니며 할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넉넉하게 학용품을 사 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소풍간다고 김밥 한번 싸주지 못하고 용돈 한 푼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른 아이들은 운동회 때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나이 드신 당신 몸으로 해 주시느라 얼마나 진땀을 빼셨을지, 어디서나 애비 에미 없다고 손가락질 받는 손자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쓸어 내리셨을지, 그때는 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그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조금이라도 더 불쌍하게 보여서 뭐 하나 얻으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싫고 창피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저희 남매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당신의 체면이나 얼굴을 모두 버리시고, 오로지 저희 남매를 위해 사셨습니다. 앉았다 하면 신세 한탄이 먼저 나오고, 불쌍한 손자들 얘기를 풀어 놓으며 눈물을 훔치시기 바빴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었고, 새 연필 한 자루라도 얻어 쓸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철없는 남매를 기르시면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강하셨지만, 또 누구보다 여리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가시는 날에는 새참으로 나온 빵을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시는 분이셨고, 1주일에 한번 장으로 나물을 팔러 가시는 날에는 순대를 한 봉지씩 사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동생과 제가 싸우면 뒤란에 있던 탱자나무 가지로 심하게 종아리를 치셨지만, 붉은 줄이 그어진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금세 눈물을 훔치시는 분이셨고, 맛있는 과자를 마음껏 못 사줘 미안하다며 문주를 부쳐주시고, 개떡을 쪄주시고, 가마솥 누룽지에 설탕을 발라주시는 분이셨고,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우산 대신 고추밭 씌우는 비닐로 온 몸을 둘러주시고 빨래집게로 여기저기 집어주시며,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놀리거든,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돌돌 싸매면 비가 한 방울도 못 들어와서 옷이 안 젖는다더라. 너도 니네 엄마한테 나처럼 해달라고 해봐.”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시던 분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봄이면 나물을 뜯어다 장에 내 팔고, 여름이면 고기를 잡아다 어죽 집에 팔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따다 묵 집에 팔고, 겨울에는 손에 마늘 독이 베이도록 마늘을 까서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그 시간들이 스물아홉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행복이라는 걸 몰라서 할머니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지요.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억척스러운 할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반항적이었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제 마음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할머니가 미워서 버릇없이 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고생하시는 할머니가 불쌍하거나 안쓰럽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을 훔쳐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할머니가 제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춘기의 저를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 남매가 아니었다면 혼자 편하게 사셨을 할머니가 손자들을 떠맡은 죄로 불쌍하게 사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철이 들 무렵에야 알았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각각 천안에 있는 상고와 예산에 있는 인문고등학교에 진학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 남매는 주말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안에 빵과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다니셨던 할머니가 새참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셔서 냉장고에 넣어놓으신 거였습니다. 남들 다 새참 먹을 때 같이 드시지 왜 이걸 냉장고에 넣어 놓으셨냐고, 유통기한 다 지나서 먹지도 못하는 데 왜 그러셨냐고 화를 내면, "니덜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야 말이지. 니덜 오먼 줄라고 냉장고에다 느 놨는디, 날짜 지나서 못 먹으먼 워쩐다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도 할머니를 가엾다고, 안쓰럽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제가, 냉장고에 가득하던 빵과 우유를 내다 버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제가 철이 들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자취하는 제게 김치와 쌀을 갖다 주시겠다고 올라오신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터미널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 찾아낸 할머니는 반갑게 제 손을 잡으시며 “아침 7시 차 타구 나왔더만, 10시두 안 돼 도착허더라. 한 3시간은 이러구 서 있은 모양이여. 기다리다 배고파서 나 먼저 짜장면 한 그릇 먹었다. 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다시 가슴 한 구석이 아렸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께 화를 냈습니다. “그러게 내가 아침 드시고 천천히 출발하시라고 안 했어! 할머니 때문에 속상해 죽겄네.” 할머니는 화가 난 손녀딸의 눈치를 살피시며 들고 오신 가방 지퍼를 여셨습니다. 할머니가 들고 오신 큰 가방 속에는 김치 통 두 개가 들어있었고, 가방 안은 김치 통에서 흘러나온 빨간 김치 국물로 한 가득이었습니다. “내가 할머니 때문에 미치겠네. 김치만 비닐봉지에 꼭 싸서 가져오셔야지, 가방에다 김치 통을 통째로 넣어오면 국물이 안 넘친데?” 할머니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이를 워쩌까. 국물이 다 새서 못 들고 가겠다. 내가 언능 수퍼 가서 봉다리 얻어올팅께 지달려라, 이?” 할머니는 터미널 안 슈퍼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얻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김치 통을 봉지 안에 넣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네덜이 지덜언 짐치 안 먹구 사나, 노인네가 버스 안에서 김치 냄새 좀 풍겼기로서니, 그렇기 코를 막구 무안을 줘?” 할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차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며 안절부절 하셨을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할머니는 김치 전해 줬으니 그만 가 봐야겠다시며 들고 오신 가방 안쪽 작은 지퍼를 열고 꼬깃꼬깃 접은 1만 원 짜리 두 장을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건네주신 1만 원 짜리는 빨갛게 물들어서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던 저는 얼른 매표소로 뛰어가 할머니 차표를 끊어다 드리고 할머니를 배웅해 드렸습니다.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시내버스 안에서 얼마나 소리 내어 울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가 젖은 가방에서 꺼내 주셨던, 빨간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던 1만 원 짜리 두 장을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직한 저는 돈을 벌게 되었고, 이제 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면 약재시장에 가서 좋다는 약재를 사다 보내 드리고, 할머니 생신이 다가오면 동네 할머니들과 식사라도 하시라고 용돈도 보내 드리고,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와 장으로 구경도 나가고, 명절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도 사 드렸습니다. 처음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먹던 날, 할머니는 돈가스 한 접시에 음료로 나온 사이다 한잔까지 쭉 비우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양두 얼마 안 되는 것이 참말로 맛나다, 이? 이런 것이면 몇 접시라두 먹겠다.” 저는 할머니의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까짓 돈가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제서야 사드리게 됐을까. 가슴이 아파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제가 먹던 접시를 할머니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그날 하얗게 서리 내린 할머니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맛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 드리리라. 남들 먹는 거, 맛있다고 하는 거, 한번씩은 다 맛보여 드리리라. 좋은 옷도 입혀 드리고 멋진 구경도 맘껏 시켜 드리리라. 언젠가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손녀딸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고, 이쁜 새끼 낳아 사는 거 보고 죽으먼 내가 소원이 없을 것인디.” 저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다음 달이면 돌을 맞는 예쁜 딸아이도 낳았습니다. 할머니는 올해로 팔순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우리 남매를 길러 내셨던 할머니는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허리도 구부러지셨고, 검은머리가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너무 늙으셔서 예전처럼 맛있는 문주를 부쳐 주시지도 못하고, 개떡을 쪄 주지도 못하고,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주시지도 못합니다. 뜨거운 밥에 올려 먹던 할머니의 얼짠지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이제는 그때 그 맛을 내시지도 못합니다. 같이 봄나물을 뜯으러 다닐 수도, 도토리를 따러 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 하면, 낡고 닳아 헤진 고무신 한 짝이 떠오릅니다. 헌 고무신처럼 평생을 마음껏 가지지 못하고 지지리 고생만 하시며 살아오신 할머니, 이제 할머니가 제 곁에 함께하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 제가 할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꽃으로 태어났으나 들풀로 사셔야 했던 그분의 인생, 이제부터라도 화사한 꽃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신 할머니! 이제 저는 할머니의 사랑과 고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우리 할머니 손을 잡고 꽃길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오래 전 눈물나게 아름다웠던 유년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웃어 보고 싶습니다. 올 봄에도 꽃은 피겠지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두 분 안녕히 계세요. -이글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