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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많은 대동강 ㅡ 손인호

털보아찌 2008. 11. 11. 15:51





      
      한많은 대동강 - 손 인호
      [SPOKEN]  나레이터 이창환/고은정
      내 고향 평양성아 그리운 대동강아
      달밝은 부벽루야 능라도 봄 버들아
      너와함께 뱃놀이로 밤을 새던 옛 추억 
      수심가야 흥을 돋군 평양기생 잘있느냐
      반월도 불새들아 연광정 봄 바람아
      영명사 종소리는 나그네를 울리더냐
      꿈에라도 잊을손가 꽃을 따던 평양처녀
      그리워서 불러보는 대동강아 내 고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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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만날 그때까지 아 ~ 소식을 물어본다 한많은 대동강아 대동강 부벽루야 뱃노래가 그립구나 귀에익은 수심가를 다시 한 번 불러본다 편지 한 장 전할길이 이다지도 없을소냐 아 ~ 썼다가 찢어버린 한많은 대동강아 야인초 작사/한복남 작곡 美男, 美聲의 가수 손인호씨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비 나리는 호남선",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하룻밤 풋사랑", "한 많은 대동강" 같은 우리의 50~60년대를 대표하는 숱한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10여 년간 정상에 서있는 동안에도 방송무대에 전혀 서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무대에서 조차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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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본 직업은 영화 녹음기사였다. 그는 가수로써 약 150여곡의 노래들을 발표했지만 영화 녹음기사로써는 무려 2천여 편 이상의 영화 녹음작업을 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로맨스 빠빠",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이 모두 그가 녹음작업을 한 영화들로 한양스튜디오의 책임자였던 그는 대종상 녹음상을 무려 일곱 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영화 녹음작업에 있어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손인호씨가 가수로써 받은 상은 단 한차례도 없다. 보릿고개 시절, 라디오와 영화가 국민들에게 최고의 오락수단 이었던 시절, 그 두 무대를 동시에 장악한 인물로 "소리의 마술사"라고 까지 불리던 손인호씨는 속칭 "38 따라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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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손효찬(孫孝燦). 1927년 평북 창성에서 출생해 창성보통학교 6학년 때, 수풍댐 건설로 마을 일대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 모두 만주 長春으로 이주해 생활했다. 해방 후 신의주로 옮긴 손인호씨는 평양에서 열렸던 이북 도민 전체 노래자랑대회인 "관서콩쿠르대회" 에 참가, "집 없는 천사" 를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 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 는 권유를 받고 남행을 결심,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2월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단둘이 서울로 내려온다. "환영합니다" 라는 플래카드가 시내 곳곳에 걸려 있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들 몸에 뿌려진 것은 DDT, 즉 살충제였다. 나이가 어려 곧바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시작해야했던 그는 당시 서울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사람은 1주일 동안 굶어도 물만 먹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고 회고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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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당시 작곡가 김해송씨가 이끌던 "KPK악단" 에서 실시한 가수모집에 응모, 참가자 3백 명 중 1등을 차지해 악단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씨가 이끌던 부길부길쇼단에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 로 전쟁터를 누볐다. 제대 후 공보처 녹음실에 입사한 그는 '대한뉴스 녹음을 담당하며 아울러 영화 녹음기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 무렵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씨... 이 인연으로 그는 노래 두 곡을 받아 취입하게 되는데, 그 곡이 바로 "나는 울었네" 와 "숨쉬는 거리" 이다. 휴전 이듬해인 1954년의 일이다. 최근 수려한 용모의 아들 손동준이 그를 이어 가요계에 얼굴을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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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