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사진첩 ★/옛날 생활

대한제국(1897~1910 ?) 그때 그시절..

털보아찌 2008. 11. 12. 18:55

 

 

 


                                                 
테오도르 잔더(1868~1945)는,
1906년 독일 황제의 명으로 일본 도쿄에 파견돼 근무하던
그해 8월부터 10월까지 한국을 여행하면서 당시의 풍물이 담긴 많은 사진을 남긴 사람이다.
 
 
 
 

 1907 대한제국 출범후 4인가마를 타고 경운궁에 들어서는 고종
 
 1907 대한제국 출범후 4인가마를 타고 경운궁에 들어서는 고종
 
 

1904 제물포항
 
 
                                                                                  서울의 성벽
  

대한제국 원구단: 고종황제 제사 지내던 곳.
 

 

■ 대한제국이란?
조선은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복고주의적인 것이었으나 근대 시설의 수용에 적극 나섰다.
조선 고종 34년(1897년)에서부터 1910년의 국권 침탈 때까지의 우리 나라 국호.
 
 
 
대한제국 구프랑스 공사관
 
 
1890년대 여인
 
    1890년대 서당: 사진사가 눈을 감지말라고 당부했을까?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있다. 
 
 
 
1890년대 주막의 개다리소반 점심식사
 
 
1900년대 기생
 
 
 
1900년대 여인
 
 
1900년대 왕실여인
 
 
1904 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
 
 
 
 
▲ 돈의문(현재 서대문)을 지나는 1904년 무렵의 전차.
1899.05.17.전차 개통
 
1895년 명성황후 사후, 고종 황제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청량리 홍릉(명성황후 능)을 빈번하게 찾는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고종에게 접근, 전차를 가설하면 행차 비용도 절감되고 백성들도 편리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솔깃한 고종은 출자액의 반을 부담하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 전차 설치를 허락한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600년사(史)’는 전차 도입 배경을 이렇게 전한다.
1899년 5월 17일(음력 사월 초파일), 서대문∼청량리 간을 잇는 전차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귀족·고관·각국 사신 등을 태우고 화려하게 장식된 전차가 줄지어 “댕 댕”거리며 종로거리를 지나자 이 ‘기묘한 괴물’을 지켜보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처음 투입된 전차는 모두 9대, 1대는 황실 전용이었다. 정차장은 없었고 사람이 손짓하면 아무데서나 멈췄다.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시골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를 끌다보니 전차를 타는 것도 쉽지 앉았다. 어렵사리 승차한 사람도 내릴 생각은 않고 종일 타고 다녀 전차 속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탑승객이 증가하면서 노선도 종로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1899년), 다시 남대문에서 용산까지(1900년 1월) 연장됐다.
 
전차 운영의 첫 불상사는 개통 후 열흘 만에 일어났다.
종로2가 앞을 지나던 전차가 다섯 살 난 아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치어 숨지게 한 것이다.
극심한 가뭄이 전차 탓이라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을 때 일어난 전차사고는 답답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전차를 뒤엎은 뒤 불살라 버렸다.
광복 후 23년간이나 대중의 발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바야흐로 전차의 시대는 가고 있었다. 1968년 11월 29일, 69년 6개월 12일 만에 마지막 전차가 왕십리를 떠났다.
 
출처 : 조선일보.2003.05.16.김정형기자 jhkim@chosun.com )
 
 
 
 
1899년 최초의 전차개통식 사진 첫 발견
고속철 원년에 만난 한국電車의 원년
당시 美'콜리어 위클리' 보도 사료수집가 김영준씨 입수


우리나라에 도입된 최초의 전차(電車)였던 한성전기회사 전차의 개통식 사진이 처음으로 발견·공개됐다.
▲ "전차 구경가세!"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우리나라 최초로 도입된 전차의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 동대문에 구름처럼 모인 당시 한성 백성들. 동대문 아래쪽에 지붕을 세운 건물은 전차 보관소이다.  사진제공=김영준씨

사진은 당시 미국에서 발행되던 주간지 ‘콜리어스 위클리’(Collier’s Weekly) 1899년 7월 15일자에 화보 형식으로 실린 6장으로, 근현대사 사료 수집가 김영준(54) 시간여행 대표가 최근 캐나다에서 입수했다.

잡지는 ‘한국인의 폭동과 악마의 차’라는 제목의 화보에서 1899년 5월 4일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열렸던 전차 개통식 때 동대문 성곽에 구름처럼 모인 구경꾼 등을 담고 있다.
‘폭동’이나 ‘악마의 차’라는 단어가 제목에 사용된 이유는 전차 개통 며칠 뒤 어린 아이가 전차에 깔려 죽으면서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잡지는 “한국인들은 전차를 악(惡)의 음모(machination)로 보았으며, 나라와 민족에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했다”고 적었다.

1899년 5월 4일 전차 개통식 당시의 사진은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1899년 9월 18일 개통한 경인철도 개통식 사진은 발견됐으나 이보다 4개월 빠른 한성전차 사진의 발견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19세기 말 전차로 인해 시작된 근대 대중교통혁명의 시작을 조선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웅변하는 사진”이라고 평했다.

 
▲ 전차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 동대문 성곽 아래쪽에 모인 백성들과 미국인들. 전차는 미국의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해 제작돼 개통식장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걸려 있다.

조선 황실이 단독 출자해 세웠지만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이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성전기회사가 당시 한성(서울)에 전차사업을 추진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서울에 대중교통 수단이 없었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이 황후의 능인 청량리 홍릉(현재는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에 행차할 때마다 10만원의 비용이 들었는데, 전차를 타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낙성대경제연구소(소장 이영훈)에 따르면 당시 10만원은 80㎏ 쌀 1만 가마 이상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기공식은 1898년 9월 15일 경희궁 앞에서 열렸다.
1899년 4월 26일 콜브란이 사회 저명 인사에게 보낸 초청장에는 ‘대중이 익숙해질 때까지 전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5마일(8㎞)로 운행할 것이며, 그 뒤로도 시속 15마일(24㎞)은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전차는 5월 4일 오후 3시 동대문 경희궁 흥화문 간 첫 운행에 성공했으며, 5월 20일부터 정상 운행에 들어갔다. 당시 독립신문 등에 따르면 전차는 정거장이 없이 손을 흔들어 탈 수 있었고, 5세 이하는 무료였다. 요금은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상등칸은 엽전 3전5푼, 하등칸은 1전5푼으로, 당시 쌀 1㎏ 가격이 4~5전인 점으로 미뤄 요금은 비싼 편이었다.

개통 초기 전차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일단 타면 동대문과 서대문 사이를 왕복하면서 좀처럼 내리지 않았고, 전차만 타다가 재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고 당시 신문들은 기록하고 있다.
▲ 전차 발전소가 세워졌던 건물.
발전소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했던 민영환 소유의 부지에 세워졌다.

그러나 개통 직후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장안에서는 전차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개통 1주일째 되던 1899년 5월 26일 파고다공원 앞에서 어린이 한 명이 전차에 치여 죽게 되자 전차에 대한 군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군중은 전차를 세운 뒤 일본인 운전사와 차장에게 뭇매를 가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고로 전차는 3개월 가까이 운행을 멈추었다.
서울의 전차는 이후 70년 가까이 운행되다가 1968년 11월 30일 운행을 멈췄다.
사진 소유자 김씨는 이 사진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출처 : 조선일보.2004.05.18.신형준기자
 
 
 
 
 

 
 

 
마을어귀에 수호신이자 이정표이며 병을 치유한다는 장승이 서있다. 이정표는 굽은 소나무가 효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7명이 7개의 장승 앞에 각각 서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1910.03.02
 
 
안중근 국제재판 노렸다.
 
일제만행 세계에 알리고자 하얼빈역 범행거사계획, 송병준 침탈대가 요구등 일본 경찰부장출신 증언.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계자들의 증언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이 포함돼 있다.

경찰 통역관 출신으로서 일제 간도총영사관 경찰부장을 지낸 아이바 기요시(相場淸)의 증언에 따르면,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체포되더라도 신병이 러시아로 인도되고 국사범이므로 사형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아이바의 진술 요지.

‘1909년 10월 26일 아침. 이토 히로부미는 다롄에서 남만주 철도를 타고 오다 관성자에서 러시아가 국빈접대용으로 개조한 특별열차로 갈아타고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사열부대는 2개 중대였는데 중대와 중대 사이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곳에서 안중근이 튀어 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조선에서는 일제 조선통치의 원흉인 이토를 살해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이름은 잊었지만 용기있는 조선 청년 7명이 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기회를 엿보던 중 신문보도를 통해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논의 끝에 안중근이 내가 하겠다고 나섰고 우덕순과 또 1명(曺道先 또는 劉東夏) 등 3명이 하얼빈에 와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하얼빈역은 동청철도의 철도부속지였다.

철도부속지는 러시아와 청간의 조약으로 양국의 행정ㆍ사법권이 모두 배제된 지역이었지만 러시아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여기서 이토를 살해하면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데다 이토 살해범은 국사범(國事犯)이 되기 때문에 관례로 보아 러시아 당국에 의해 구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재판기록에 그렇게 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측에 호의를 보이기 위해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총영사에게 넘기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

하얼빈에는 일본총영사관이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안중근은 일본측의 재판을 받게 됐다.
 
 
1910 신식 결혼
 
 
 
 
100년전 한반도에선...
자료수집가 유성철씨 日서 수집 150여점 제공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 초기의 도시 풍경과 생활상을 담은 사진집이 공개됐다. 근현대자료수집가 유성철(兪成哲·46)씨가 최근 일본 도쿄 긴자거리에서 입수한 이 사진집에는 서울과 평양, 부산, 인천, 개성, 회령, 목포, 군산 등 전국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개항기의 도시와 일상 풍경, 그리고 궁궐의 모습 등을 담은 150여장의 흑백사진이 들어 있다.
 
촬영자는 일본인으로 추정되지만 촬영자가 누군지와 시기 등은 사진집에 적혀 있지 않았고, 사진 뒷면에 짤막한 설명이 적혀 있을 뿐이다. 근·현대사 전문가들은 “영국·러시아 영사관 건물이나 일본이 용산에 세운 사령부 사진, 덕수궁 석조전의 모습 등을 참고할 때 촬영 시기는 1880~1910년대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목포
개항 뒤 목포의 풍경. 기와 지붕으로 잘 단장한 집들에서 근대를 향한 목포의 발걸음을 느낄 수 있다.
 
대구 큰 길
근대식 건물이 들어선 대구의 모습. 사진에는 대구 원정통(元町通)이라고 적혀 있다.
 
대동강 모란봉
대동강 북안(北岸)의 모란봉 풍경. 가운데 있는 건물이 모란대이며, 그 아래쪽으로 평양을 둘러싼 평양성곽도 보인다.
 
 
칼 쓴 죄수
칼을 목에 쓴 죄수들의 모습. 칼은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씌우던 형틀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의병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女人
물동이를 든 조선 여인.가슴을 가리지 않았다.
 
궁중무희들과 악사
덕수궁의 정전(正殿·임금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던 곳)인 중화전(中和殿)에 모인 여령(女伶)들의 모습. 사진에는 관청의 관기(官妓)라고 적혀 있지만 홍순민 박사(한국 근대사)는 “여령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여령은 궁중에서 큰 잔치가 있을 때 춤을 추는 여자들을 말한다. 보통 궁녀들이 했지만 사람이 부족할 때는 민간의 기생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노점
길거리 좌판 풍경, 허기진 지게꾼이 배를 채우는 모습이 보인다
 
거북선 등은 ‘원형’에 가까웠다…세밀한 묘사·제원 처음
 
조선시대 거북선의 실물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서화가 17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공개됐다. 사업가 윤원영(52)씨는 이날 가로 176㎝, 세로 240㎝의 비단천에 용의 머리와 거북의 몸체 형태를 지닌 군용선 4척의 모습을 담은 고서화 사진을 공개했다.
 
고서화에 담긴 거북선은 3층 구조로, 군단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등이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걸어다닐 수 있는 길이 그려져 있다. 거북선의 전체 모습은 ‘이충무공 전서’에 대략적인 스케치로 그려져 있고, 몇몇 민화 형태로만 전해 오고 있어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윤씨는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역임한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 마우리의 손자며느리인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 구입했다”면서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의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그림이라는 설명을 마우리 여사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윤씨는 또 “조지아대에서 탄소동위원소 방식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300~350년 전 제작된 그림으로 추정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윤씨는 “그림을 그릴 당시에 사용했던 석채(광물성 물감)가 용머리 방패 깃발 등 일부분에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일본에 건너간 뒤 덧칠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재미 기업인 윤원영씨가 17일 공개한 300여년 전 거북선 그림. 3층짜리 군선의 모습과 배 위에서 회의 중인 장수, 병사들의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궁성 및 서울 도성을 수비하는 친위대가 육조 앞에서 러시아 군사교관으로부터 군사훈련을 받고있다.
휴대한 총은 러시아제 베르당 총.


한 선비가 먼 길을 떠나기 위해 말을 타고 마부꾼과 함께 서있다.
선그라스를 끼고있는 선비의 모습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