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둘둘 만 신문들을 가득 담은 배달 가방을 자전거 핸들에 걸고 ,
보도 위에 끌고 다녔다. 하지만 신문 뭉치를 실은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일은
결코 수월치 않았다 .
며칠 못 가서 나는 자전거를 집에다 두고, 철제 바구니에 바퀴가 두 개 달린
어머니의 쇼핑 수레를 빌렸다.
자전거로 신문을 배달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
집집마다 신문을 던질 기회는 한 번씩 뿐이다 . 만일 신문이 현관이나 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떨어지지 않고 엉뚱한 곳에 떨어진다면 정말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쇼핑 수레를 보도 위에 세워놓고 신문을 놓아야 할 자리에
정확히 갖다 놓았다. 혹 이층 현관에 신문을 던지다 실패할 경우에는 도로
집어다가 다시 던져 넣었다.
특히 일요일에는 신문의 양이 다른 날보다 더 많아 무거웠지만 나는 신문을
일일이 계단 위까지 배달했다 .
비가 오는 날에는 방충문 안까지 , 아파트의 경우에는 입구의 홀까지 신문을
들여다 놓았다.
또 비나 눈이 올 때는 아버지의 낡은 비옷으로 수레에 실은 신문을 덮어서
젖지 않도록 주의했다 .
자전거로 배달하는 것보다 손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시간이 더 오래 걸렸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나는 신문을 배달하면서 이웃에 사는 이탈리아 , 독일, 폴란드 계의 노동 계층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 항상 나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 .
내가 맡은 구역을 도는 동안 강아지들이 딸린 어미 개라든지, 젖은 아스팔트
위에 번져 있는 무지개빛 기름 얼룩 같은 것이 내 흥미를 끌었는데 그런 것이
나타나면 나는 잠시동안 멈춰서서 바라보곤 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낮에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셨지만,
몸이 너무나 쇠약해져서 가외로 다른 일들은 하실 수 없었다.
우리는 각종 청구서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어야
했고, 그래서 내 자전거도 팔게 되었다 . 그때까지도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기 때문에 자전거를 파는 데는 전혀 이의가 없었다.
미셀리 씨는 내가 신문 배달을 할 때 자전거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대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구독자를 잃거나
신문을 진흙탕에 빠트리는 일로 야단치는 것 말고는 신문 배달하는 소년들에게
거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
8 개월 동안 나는 내 구역에서 구독자를 36 명에서 59 명으로 늘려 놓았다.
대부분 이미 구독하고 있던 사람들이 신문을 새로 구독하려고 하는 이웃에게
일부러 나를 소개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길에서 나를 불러 세워 자기
집에도 신문을 넣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신문 한 부당 1 센트를 벌었으며 일요일에는 5 센트를
벌었다.
나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수금을 했는데 거의 모든 구독자들이 내게 별도로
5-10센트를 주기 시작했다. 그 팁은 곧 미셀리 씨에게서 받는 급료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여전히 일을 많이 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급료의
대부분을 엄마에게 드렸다 .
1951 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목요일 저녁,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수금을 하러
나섰고 첫 번째 구독자의 집 벨을 울렸다. 불이 켜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
아무 대답도 없어서 나는 다음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 집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 다음 집도 마찬가지였고, 그 다음 번 집도 똑같았다. 이윽고 내 구역의 거의
모든 집 문을 두드리거나 벨을 울려보았지만 사람이 집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몹시 난감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보급소에 신문 대금을 내야 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긴 했어도 사람들이 모두 물건을 사러 외출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고든 씨 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으며 음악 소리와 사람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굉장히 기뻤다.
나는 곧 벨을 눌렀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더니 고든 씨가 나를 거의 끌다시피
하면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
그 집 거실에는 59 명이나 되는 내 구역의 구독자들이 거의 모두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방 한가운데에는 새 자전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사과사탕처럼 빨간 색이었으며, 발전기로 켜지는 헤드라이트와
벨도 있었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봉투들로 가득 찬 불룩한 가방이 핸들에 매달려 있었다.
"네 자전거란다." 고든 부인이 말했다.
" 우리 모두가 조금씩 정성을 보탰단다 ."
봉투마다 일주일치 구독료와 크리스마스 카드가 들어 있었다 .
대부분 푸짐한 팁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한 부인이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다음 다정하게 나를 방
한가운데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너처럼 훌륭한 신문배달소년은 처음 보았단다. 한번도 신문배달이
늦거나 빠지는 일이 없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신문이 젖은 경우가 없더구나.
우리 모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네가 조그만 손수레를 밀며 열심히 배달하는
모습을 보았단다. 우리는 네가 틀림없이 자전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나는 "고맙습니다 "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하고 또 했다.
집에 돌아와서 팁을 세어보니 100달러가 넘었다. 이 예상치 못한 일로 나는
가족의 영웅이 되었고, 온식구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근사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내 구역의 구독자들이 미셀리 씨에게 부탁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튿날 내가
보급소로 신문을 받으러 갔을 때 미셀리 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내일 10시까지 자전거를 가져 오너라. 타는 법을 가르쳐줄테니." 그가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에 입대하게 되어 그 자전거를 내 동생 테드에게
주었다.
그 자전거가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때 그분들이 내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 있다 .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더라도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값진
교훈이 그것이다.
나는 내게 그런 교훈을 가르쳐준 친절한 시카고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나 역시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 교훈을 나누어 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