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때 처음 만나,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있어 준 아내와의 결혼 기념일입니다. 딸 일곱의 막내인 아내는 아들일 기다리며, 장인이 집에서는 미리 사내아이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그래서 영수입니다. 친구처럼 지낼때 늘 부르던 이름이 어느 날 아이를 나으면서 "서희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10년이 넘게 서희엄마라고 부르면서 나는 어느듯 영수를 잊고 살았습니다. 방송국에 근무하다 96년에 나와서 의욕을 갖고 벤쳐를 시작했습니다. 늘 회사에서 직원들과 같이 자던 날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했던 회사가 망하고, 2000년에 다시 회사를 시작했지만, 요즘 또 많이 어려워져 그 곱던 얼굴에 그늘이 져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내가 있어서, 늘 새로운 도전에 용감했던 나 자신이 참 많이 후회가 됩니다. 멀리 출장와서 아내에게 오늘은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은 아내와 14번째 결혼 기념일입니다. 내 아내가 오늘은 이 편지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영수에게 -- 참 오랫동안 그 이름을 아스라이 잊고 살았다. 어둔 골목길 같은 인생에서 그냥 나지막이 영수야 이렇게 부르면, 술에 취해 혹은 오물에 젖어비척거리는 나를 늘 토닥거렸다. 그 포근한 안도감에 문득 나는 내가 걷던 까만 길을 다 잊고, 네가 가끔 힘들어하고 또 재촉하며 `차마 나에게 무슨 상처’라도 될까‘ 무언가를 쭈뼛거리고 말할 때도 나는 신이 나서 귀를 닫아두고는 골목길 담장 너머를 기웃거렸다. 왜 이리 그렇게 보낸 세월에 서러운 마음이 들까 ‘냉철함과 창백함을 지키기 위해’ 삶의 끝에 칼날을 꽂고 어느 다방에서 자살했다던 시인의 그 유서 한 구절이 내 못난 반쪽의 자화상 같아서 서럽고 차라리 창백해지지도 못하고 냉철하지도 못한 비척거림이 유난히 초라해 보여 또 서럽고한 꾸러미 선물 하나 챙기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향버스에 오르는 초로의 인력시장 노동자 같은 그림자가 서럽다 또 안 그래도 힘겨운 영수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내면 어떤 기분일까를 잘 알면서도, 그저 철없는 아이처럼 주절거리는이 밤이 그저 서럽다. 요 몇 달을 차가운 현실의 바닥에 내쳐져얼마나 많이 후회하고 참회하고, 또 영혼의 살점을 물어뜯으며 혹은 채찍질하며, 내가 바랐던 소망 하나는 영수에게 환한 웃음을 돌려주고 싶다는 바램이었다. 파스를 붙여주며, 꺼칠해진 너의 등짝에 마음이 메이고 내 곁에 다가오면 습관처럼 네 손을 쓰다듬다 예전과 달라진 촉감에 퍼뜩 정신이 들때도, 자고 있는 너의 발을 조물락거릴 때도... 이제 고백해야겠다. 내가 심판 받는 자리에서 신이 나에게 묻는다면, “너와 함께 살게 해준 세월은 신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좀은 부끄러우나 좀 더 많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시간들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를이제는 좀 철이 들었는지그저 이 한 줄을 치는데 울컥 치솟는 무엇처럼 생생히 느껴지는데... 우리가 서 있는 이 차가운 현실이 어쩌면 나의 고백마저 얼어붙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지만,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매서워질지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번쯤 너의 환한 웃음을 보고 싶다는 희망으로 어떻게든 걸어갈까 보다. 고맙고 또 고맙고,헤아릴 수 없이 감사한다. 그리고 다음 말은환한 해가 뜨는 날 좀은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2004년 5월 26일이제는 참 초라해진 우리 결혼을 기념하며 부산 출장 중에 현식이가 영수에게...... 이글은 MBC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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