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사진첩 ★/추억의 사진

70 년대 영화벽보와 앨범

털보아찌 2009. 2. 27. 13:56

‘젊음의 행진’

1981~1994년까지 방송되었던 KBS-TV 가요 버라이어티쇼 ‘젊음의 행진’
MC: 송승환·왕영은,(가수 ‘배철수’씨가 감전사고 당했을 때 진행자) 최수종·하희라, 김형곤·장두석, 개그맨 주병진, 댄스팀 짝궁들. 출연가수: 송골매, 소방차, 이지연, 김완선, 박남정, 신승훈, 강수지, 신해철,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 위)MBC-TV '젊음의 행진' 큐 시트
연주를 맡은 청용들(드래존즈), 가수 이성애, 둘다섯, 금비와 단비, 뽀빠이 이상용씨 등 눈에 익은 연예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사진 아래)
'결혼교실' (1970년) 감독 정인엽. 출연: 신성일, 문희,윤정희, 남정임 출연
독신녀 클럽의 세 아가씨는 재벌회사의 부사장이며 여자들을 업신여기는 성일의 콧대를 꺽어 주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세 아가씨는 각기 제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어서 따로 따로 성일을 접촉한다.
그녀들의 속셈을 알고 있는 성일은 그 세 아가씨를 모두 사랑하는 척하고 골탕을 먹인다.
마침내 속은 것을 안 세 아가씨들이 작당해서 그를 납치하려고 하지만 그의 약혼녀가 그를 무스탕에 태우고 멀리 사라진다.


국도극장 개봉 새영화 '결혼교실' 신문 기사와 아래 영화 포스터(1970년)




특히 포항분들은 옛날 생각 나시겠어요. 1978년 4월 6일 포항시 죽도동 '코스모스 다방' 영수증. 커피 2잔에 '260원'이었던 시절.


영화사상 불멸의 배역. 영화 '황혼의 애상'(동성영화사 1959년)
왼쪽 시계방향으로 김동원, 최은희, 김지미, 허장강,주증녀, 김승호, 전옥, 황해, 도금봉, 박암, 엄앵란, 최성호, 노경희, 김희갑, 구봉서 등 출연
 
(줄거리)살인수로 복역중인 그는 방황하는 어린 딸을 생각하다 탈옥을 시도해 성공한다. 탈옥수의 몸으로 어린딸의 행복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하며 살아간 가는 성장한 딸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딸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 그는 눈물을 흘리며 딸을 배웅한 뒤 자신이 탈옥했던 형무소로 돌아간다.


김시스터즈
 
"한국 최초의 보컬 그룹 <김시스터즈>가 대중 앞에 선 것은 1953년 가을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에서였다.
하지만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다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당시 신문기사 중)
 
김시스터즈가 어머니 이난영의 장례식엔 참석치 못하고 1970년에 귀국하였을땐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고 그들이 가진 시민회관 공연도 대성공이었으며 「목포의 눈물」은 관객과 함께 울고 또 부르고 울고 또 부른 혼연일체의 무대가 되었다.

김시스터즈가 어머니 이난영의 장례식엔 참석치 못하고 1970년에 귀국하였을땐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고 그들이 가진 시민회관 공연도 대성공이었으며 「목포의 눈물」은 관객과 함께 울고 또 부르고 울고 또 부른 혼연일체의 무대가 되었다.
 
-한국 팬들도 열광
김시스터즈는 월남과 유럽의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성공적인 순회공연을 마치고 다시 미국에 돌아오고 또 각자 결혼을 하게 된다. 이미 어머니 이난영이 미국에 왔을 때 이제 남자와 데이트를 해도 좋다는 허락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이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불효를 용서받으러 1970년에 일시 귀국하는 것이다.
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김숙자의 회고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유는 이미 설명드렸지만 70년대가 되니까 저희들도 나름의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전엔 매니저의 명령에 다라 움직이고 도무지 뭐가 뭔지 분간을 못할 때이니 비자가 문제가 된다고 말하면 그런 줄 아는 것이지요.

실제로 저희가 미국에 처음 오려고 할 때도 비자문제로 무척 고생을 한 기억이 있으니 만약 다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만인의 애도 속에 행복하게 가셨으니 저희들도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번에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그렇게 국민들의 애도 속에 가셨다고 하더군요. 대중 연예인은 그런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고 이주일씨도 그럴 것입니다. 연예인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저희들이 한국에 도착하여 보니 서울은 저희가 떠날 때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더군요. 폐허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선 국민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독일 공연에 갔을 때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더군요.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게 조국이 발전되었구나 생각하니 너무 기뻤어요.”라며 말을 이어갔다.
 
-김시스터즈의 앨범 자켓


 
딸들이 부른 「목포의 눈물」
김시스터즈 공연은 시민회관에서 열렸는데 참석한 관객 모두가 혼연일치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관객이 무대의 공연자와 호응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래와 매너가 워낙 흥겨우니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절로 어깨가 들썩거린 것이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불세출의 명곡인 「목포의 눈물」을 부르자 관객들도 따라 합창을 하며 무대와 객석은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젠 차라리 「서울의 눈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부르고 또 부르고 목이 메이도록 부른 「목포의 눈물」이었으며 관객들도 눈이 붓도록 울고 또 울며 부른 노래였다. 당시 이 방송은 MBC TV에서 2시간 녹화방송을 했고 다시 신진레코드에서 2장으로 음반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가수 윤복희가 미니 스커트 열풍으로 서울을 휘저은 것처럼 미국에서 온 가수들이 이렇게 한번씩 서울을 들뜨게 만든 것이다. 가는 곳마다 환영이었고 유행이란 것이 그런 것처럼 모든 젊은이들이 김시스터즈 흉내를 내곤 하였다. 이들의 출연으로 다시 한국 여성 보컬 그룹이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김시스터즈는 미국으로 돌아오고 이제 그룹의 멤버교체가 일어나는 것이다. 


 
해방정국과 한국동란은 다시 한번 국가 전체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이산가족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민족의 비극으로 남아있다. 비록 이들에게만 닥친 일은 아니지만 동란시에 김해송은 납북이 되었고 북송도중 처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6.25가 끝나고 8군무대에 선 김시스터즈가 다정하게 노래 부르고 있다
당시 공산당의 입장으로 보면 연예인들은 브르조아의 상징이나 부패한 군상으로 여겨져 숙청대상의 우선 순위였기 때문이다. 동란 직전까지 김해송과 이난영은 필동의 대한극장 앞에 방이 13개나 되는 저택에 살만큼 윤택했고 김해송은 많은 자녀들을 낳아 보컬그룹을 만들 꿈을 그때부터 꾸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피난을 갈 수 있었음에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평안남도 개천군이 고향이고 또 학창시절 일본에 저항한 경력도 있기에 ‘설마’ 했을 것이다. 이난영도 잡혀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아이들 핑계로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이난영은 매년 무대에 서면서 12남매를 낳을 만큼 금슬이 좋았지만 동란은 이 가정을 풍비박산시키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이난영은 얼마 후에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남인수와 순애보적인 사랑에 빠지면서 한국가요사에 길이 남는 연애다운 연애를 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인수 마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으면서 이난영은 사랑만 잃은 것이 아닌 자신의 인생이 흔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목포의 눈물’을 다시 흘리고 만다.
다시 부른 ‘목포의 눈물’
노래를 부른 가수는 노랫말처럼 된다면서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이나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또 송대관의 ‘쨍하고 해뜰 날’을 예로 들었지만 이난영이 바로 그랬다.
 
-어린시절의 김시스터즈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20대인 1930년에도 불렀지만 1950년에 40대에 다시 한번 불렀다. 노래의 완숙미와 더불어 겪고 있는 애절함을 뼈저리게 노래에 담아 불세출의 명곡인 ‘목포의 눈물’ 노래 그대로 그야말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된 것이다. 소설 같기도 하고 신파 같기도 한 인생 드라마가 펼쳐지는 중에도 이들 사이에 난 아이들은 성장해 가고 있었다.


(위)김시스터즈의 어머니.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 여사. 아래는 이난영 여사 남편 '김해송'씨


원래 두 부부 사이엔 12남매가 있었으나 아들 다섯은 병사를 하고 7남매만 남아 있었다. 이들 7남매 모두는 김해송에게 어렸을 적부터 악기와 노래 연습을 재롱 수준이 아닌 혹독할 정도로 훈련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부모들의 예술적 끼를 충분히 안고 태어났기에 ‘김시스터즈’나 ‘김브라더스’의 출현은 이미 예고가 된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시간이라는 물레가 이들의 성숙만 돌려주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기량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더 노력해서 연마했느냐 하는 사실이 우리에겐 훨씬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오고 있다.
노력에 대한 화답
안중근 의사의 유언인 ‘인내와 노력만 있다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다. 인내는 환희에 이르는 길이다’처럼 그들은 무한한 인내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정제된 모습으로 팬들 앞에 섰기 때문이다. 일시적 운이 아닌 피와 땀의 결실로 맺어진 수정 같은 동작이었고 미소였기에 대중들은 감동으로 그들에게 화답하는 것이다.
 
-1940년대 저고리 Sisters. 가운데가 이난영씨



특히 라스베가스에 진출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중의 파격이었고 클래식에 카네기 홀이 있다면 대중적인 노래의 메카가 바로 라스베가스 무대였다. 그러나 ‘김시스터즈’를 말하려면 부모들의 예술세계와 그에 따른 사회적 상황에 대한 조명을 좀더 해야 한다. 그것은 ‘김시스터즈’ 탄생의 뿌리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재다능한 악기연주나 무대매너가 모두 연고가 있고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1969년 트윈폴리오(송창식, 윤형주)

영화배우 '강영'씨

(사진 위)가수 최희준, 김동건 아나운서. 그 다음은 성명미상
(아래)TBC 아나운서실에서 왼쪽부터 김동건, 민창기 아나운서




가수 '김만수'씨
 
김만수는 1970년대 중반 "영아", "푸른시절", "눈이 큰 아이","진아의 꿈" 등 청소년 취향의 노래로 소녀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가수이다.
준수한 용모에 말솜씨가 뛰어났던 그는 당시 TBC 방송 (현재 KBS와 통합)의 "오라 오라 오라","노래하는 곳에","당신을 스타로"등의 인기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그 결과 1977년 MBC,KBS의 10대 가수로도 선정됐었다.
 
그는 뒤늦은 군입대로 3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록 스타일의 노래 "그사람"으로 다시 인기를 만회하였으나 새로 결성한 "김만수와 4번타자"라는 그룹이 멤버간의 갈등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후로 그는 가수활동을 미뤄둔 채 건축업에 종사하며 사업가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미국,일본을 왕래하며 간간이 공연무대에 올랐다.

그는 가요계를 떠난지 8년여만인 1992년에 트로트 계열의 "사랑의 아픔"과 고고 타입의 "마지막 여자"를 들고 70년대 중반 발랄한 청년의 모습이 아닌 장년의 모습으로 가요계에 복귀하였다.


가수겸 영화배우 '김보연' (본명 : 김복순) 
1957년 12월 31일생.  키 160cm, 체중 47kg. 혈액형 O형. 미국 더스칼럼대학 무대디자인 전공 
탤런트 전노민과 2005년 결혼.  취미는 수영, 수예  특기는 노래, 태권도
경력 : KBS 9시에 만납시다 MC.  TBS 라디오 9595쇼 MC.  1976년 MBC 공채 탤런트 8기 
수상 : 1995년 제6회 춘사영화예술상 여자우수연기상 
데뷔 : 1976년 영화 '어머니와 아들'
작품 : 드라마 'SBS 이 부부가 사는 법', 'MBC 당신', 'MBC 타오르는 강'
드라마 : 천년지애, 섬마을 선생님, 부모님 전상서
영화 : 하류 인생, 그 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 형사 Duelist


영화배우 '김삼화'

 '김상국'
 
60-70년대 연예계의 ‘악동’으로 불린 가수 겸 영화배우 김상국.
진한 허스키 보컬로 ‘불나비’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쾌지나 칭칭나네’ ‘송아지’등 재즈에서 민요, 동요까지 폭 넓은 레퍼토리를 놀라운 호소력으로 소화했던 그는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울부짖는 듯 했던 그의 노래와 세상 근심을 날려버리듯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코믹은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쇼 무대의 명물’이라 불리게 했다. 그는 뜨거운 열정과 톡톡 튀는 개성으로 대중에게 강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괴물 엔터테이너’였다.
1934년 1월 24일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난 그는 몸은 왜소했지만 총명했다. 어린시절 그의 보물 1호는 일본군인이 쓰던 찌그러진 신호나팔 악기. 어른들도 놀랠 정도로 나팔을 멋지게 불렀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 그래서 10여명의 동네 개구쟁이들과 모여 ‘만주로 달아나자’는 엉뚱한 모의를 하고 잡혔을 때를 위해 일본 헌병을 칼로 찔러 죽이는 연습까지 했을 정도.
경남중학에 입학하던 해에 지나가는 소달구지에 몸을 싣고 어른들이 부르는 도라지타령에 장단을 맞추며 신나게 태극기를 흔들며 해방을 맞았다. 경남중학 밴드부에 들어간 그는 드럼, 트럼펫, 알토 색스폰 등 다양한 악기를 접했다. 끼가 많았던 그는 기계체조와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도 곧잘 했고 특히 영어성적이 뛰어났었다. 중학 4학년 때인 16살 때, 6.26전쟁이 터졌다. 당시 부산 범일동 그의 집 앞 사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탱크를 앞세운 미군들의 행군 대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다녔다. 어느 날, 친구들과 거리에 나가 구경을 하던 중 미군 탱크가 김상국 앞에 멈춰서 길을 물어왔다. 영어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주저 없이 영어로 대답했다. 그런 그가 귀여웠던지 미군은 그를 탱크에 싣고 미군부대로 데려갔다. 곧바로 미군부대 나이트클럽으로 인계된 그는 소년병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그는 ‘찌코’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미군들의 마스코트가 되었을 만큼 귀염을 받았다. 특히 클럽장 윌리엄 대위는 그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었다. 이때 그는 외국의 재즈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정식 군인이 되고 싶어 헌병7기에 원서를 냈지만 탈락했다. 키가 작아서 떨어졌던지라 홧김에 육해공군 모두 찾아 다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래서 친아버지 같았던 윌리엄 미 대위의 주선으로 진해의 미 K-10공군기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를 아껴주었던 윌리엄 대위의 전사 소식을 접한 후 부대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복학했지만 학교 공부보다는 클럽에서 즐겨 들었던 재즈음악이 생각나 레코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부산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또다시 미군부대에 들어가 미 군사 고문단의 통신실, 사병침실을 청소하고 사령관실의 하우스 키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때 한달 수입은 대기업 봉급의 2배가 넘는 1백 달러나 될 정도로 그는 풍족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온통 머리 속에 자리 잡은 음악 때문에 방황을 일삼던 그는휴학을 밥 먹듯 했다. 휴학을 할 때마다 댄스 홀에 나가 트럼펫을 연주했다. 연주자로 제법 인기를 끌면서 스타의 꿈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9년만에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부산지역 어디서 건 ‘음악 콩쿨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만사 제쳐놓고 참가해 점차 콩쿨대회의 명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산 MBC에선 공개방송을 열 때 마다 이 명물을 잊지 않고 불러냈다. 그는 미군부대에서 배운 재즈로 제법 인기가수 행세를 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물밀 듯이 밀어닥친 외국음악의 영향으로 소울, 흑인 영가 등 흑인 노래 붐이 일어났다. 일반무대에 선 그는 루이 암스트롱의 걸쭉한 창법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특이한 창법 뿐 아니라 무대에서는 괴상한 몸짓과 쇼맨십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그의 무대를 본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서 김상국의 이름 석자는 제법 유명해졌다. 작은 외모핸디캡을 뛰어넘으려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제법 유명세를 타면서 부산의 큰 나이트클럽 ‘백조’에서 출연섭외가 들어왔다. 유명 가수들의 십분의 일이었던 하루 2백원의 개런티를 받는 3류가수 대접을 받았지만 그는 정식 가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27세를 넘기고 있었다. ‘국제쇼’의 정식단원이 된 그는 대구로 첫 원정공연에 나섰다. 하지만 공연이 흥행부진을 면치 못해 여관비조차 내지 못하게 되자 한 쇼 단은 그를 볼모로 잡혀놓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알거지가 되어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30살이 되어서야 서울무대로 진출을 시도했다.
 
(앨범)사진 왼쪽이 작곡가 '정풍송'씨. 오른쪽은 가수 '김상국'씨

서울 상경 후 ‘다이어먼드쇼’, ‘서울쇼’등 밤무대에서 인기를 얻어갔다. 그러던 중 꿈에서나 그렸던 시민회관 무대에 서게 되었다. 당대의 인기가수 남석훈과의 조인트 공연이었다. 시민회관 간판에는 ‘부산서 온 괴물가수 김상국과 최고 인기가수 남석훈의 대결’이란 타이틀이 대문짝만 하게 내걸렸다. 무려 2개월에 걸친 장기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공연의 성공은 드디어 음반발표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65년 그는 작곡가 김인배로 부터 공식 데뷔 곡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와 ‘쾌지나 칭칭나네’를 받아 발표했다. 수록된 5곡 중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라디오 인기가요 톱을 장식했을 정도 엄청난 반응을 몰고 왔다. 당대 최고의 가수최희준과 스플릿 음반(오아시스)으로 꾸며진 이 음반에 이어 ‘불량소녀장미’, ‘여자가 웃을 때’등으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66년‘껌 씹는 아가씨’가 금지곡으로 묶이는 아픔도 있었지만 인기가수로 떠오른 그에게 영화출연 교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요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 주제가 ‘ 불나비’(김강섭 곡)는 그의 대표곡. 절절한 톤으로 폭발적인 가창력을 선보였던 그 곡은 한국 대중 음악사가 남긴 명곡의 대열에 꼽힐 만큼 인상적이었다. 영화배우로 영역을 넓힌 그는 ‘불량소녀 장미’를 시작으로 ‘육군 김일병’‘벌거숭이’‘8도 장군’ ‘정사’‘불나비’ 등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했을 만큼 그는 가수로서의 인기를 등에 업은 일회성 연기자가 아닌 타고난 끼를 바탕으로 한 탄탄한 연기력으로 인정을 받았다.
늘 아이디어가 번뜩였던 그는 일본 교포를 위한 공연 때 어떤 상황에서도 새롭게 풀어낼 수 있게 마음대로 개사를 시도 할 수 있는 신민요 ‘ 쾌지나 칭칭나네’를 생각해 냈다. 또 동요 ‘송아지’도 가사에 변화를 주는 새로운 편곡으로 웃음과 함께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도를 넘어설 만큼 짓궂은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골탕 먹이던 그는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행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원로쇼 무대 사회자들은 “김상국은 무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즐겁게 했던 진정한 엔터테이너”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는 단원들과 어울리다가 신이 나면 자신의 은밀한 신체 부위까지 거침없이 드러낼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주체할 길 없는 장난끼 탓에 여성단원 숙소에 슬그머니 다가가 방문을 슬쩍 열고 자신의 남성을 불쑥 집어넣는 일도 서슴지 않아 대경실색한 여성 단원들이 괴성을 내지르게 했던 철없는 만년 개구쟁이였다.
1960년대 말 활동이 왕성한 가수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친목 단체 ‘ 메미회’ 회원이 되었다. 당시 회원은 김상국을 포함 최희준, 현미,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포클로버(박형준ㆍ유주용ㆍ위키 리) 김상희, 이미자, 박상규, 조영남, 블루벨스의 김천악, 장세용, 박일호, 이시스터스의 김천숙, 김명자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었다. 68년 4월 숙명여대 체육과에서 무용을 전공했던 차정화씨와 결혼했다. 인기의 절정을 이뤘던 70년 초. 자유분방했던 그는 여자 문제로 6개월간 잠적했을 만큼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무너진 이미지와 인기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눈물겨운 내조로그는 재기에 성공했다. 1971년 서울 시민회관 무대에 나타난 김상국. 악동기질은 여전했다. 멀지 않은 곳에 화장실이 있음에도 그는 늘 무대 뒤에서 실례를 했다. 한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당시 시민회관 무대감독 배영달씨와 말다툼이 벌어졌다. 하지만 김상국은 “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다”며 태연하게 응수했다. 결국 김상국의 사과로 말다툼은 끝났지만 계속 무대뒤에서 소변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배영달씨도 마침내 포기하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로 유명했던 그는 구봉서 이기동과 함께 1972년 8월 뮤지컬 극단 예그린의 시민회관 10주년 기념공연 무대에 올랐다.‘살짜기 옵서예’등 예그린의 히트 뮤지컬 모음 형식으로 진행된 무대였다. 또 가수들의 축제인 ‘72 가수의 대향연’ 무대에서도 그의 끼를 당해 낼 가수는 아무도 없었다. 코미디언과 무용수들을 이용하지 않고 코믹 연기에 소질이 있는 김상국을 주축으로 해 서수남 하청일 등 70여명의 가수들이 꾸민 무대였다.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코믹 뮤지컬 ‘요절 춘향전’. 하춘화가 춘향으로, 나훈아가 이도령으로 나왔지만 이날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방자로 출연한 김상국이었다. 그는 객석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탁월한 코믹 연기를 펼쳐 보였다. 공연의 대성공으로 그는 무대 공연 실황을 모아 ‘김상국 코믹 원맨 쑈-아세아 1973’이라는 음반까지 발표했다. 그를 가수가 아닌 코미디언으로 기억하는 대중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가수들의 화합에 큰 기여를 했던 ‘연예인 체육 클럽’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연예인야구단과 축구단 창설의 주역이었던 그는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사용하는 선행을 펼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인기도 퇴색했다. 하지만 1985년과 1989년 대한항공창립 20주년과 25주년을 기념해 파리-베를린-런던 등 유럽을 순회하는 두차례 기념 공연에서 그는 이미자, 박상규, 주현미, 전영록, 민해경과 함께 참여해 건재를 과시했다. 1993년에는 상업 민간 방송으로 출범한 SBS TV 코믹드라마 제3극장 ‘아버지와 아들’‘토요일 7시 웃으면 좋아요’ 등에 잇따라 출연했다. 익살과 해학이 뛰어났던 그는 KBS 6시 ‘내 고향 장터’의 리포터로 변신해 녹슬지 않은 끼를 뽐내며 맹활약했다. 99년에는 SBSTV ‘출발 모닝 와이드’ 여름 특집 프로에 리포터로 출연해 고향 부산 기장의 곰장어를 소개했다. 이 때부터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명물 연예인으로 부각된 그는 2000년 3월 소주업체 진로가 내놓은 ‘참이슬’의 부산 모델로도 발탁됐다. 주 모델인 황수정을 제치고 부산지역 신문에 게재돼 마도로스 모자 아래서 환하게 웃는 그의 광고 사진은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변신은 끝이 없었다. 그 해 9월에는 부산일보에서 주관하는 여성 대학에서‘김상국과 함께 즐거운 인생을’이라는 문화 강좌를 열었다. 2002년에는 철도청으로부터 월드컵 기간 철도 관련 홍보를 위해 명예 부산역장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한국 연예계의 최대 걸물 중 한 명인 김상국은 7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지역의 온갖 축제 무대에 오르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출처: 주간한국.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가수 '김상희'

가수 '김세화'씨의 '눈물로 쓴 편지'가 생각납니다.. 가수 '권태수'씨와 부부라는군요. 듀엣으로 '작은 연인들'을 불렀지요.
(아래)김세화씨 남편  가수 '권태수씨. '눈으로', '아기곰'이란 곡이 생각나네요.



가수 '김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