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둑 투둑 ...'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K는 고개를 돌렸읍니다.
유리창에 잠시 머물다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은 소리만큼이나 굵어
보입니다.
내일 부장님께 보고할 내용을 적어나가던 펜을 놓고 담배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읍니다.
그리고는 '헤이즐 넛'커피가 담긴 잔을 들고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
봅니다.
3 년전 그녀와 헤어질 때도 이렇게 비가 왔었읍니다.
K는 그녀에게 줄 장미꽃 한송이를 투명한 셀루판 종이에 싸고서 약속
장소로 갔었읍니다. 그러나, 장미꽃을 받아든 그녀의 모습은 예전의 그
기뻐하던 모습이 아니었읍니다.
더이상 받을 수 없다며 다시 돌려준 장미꽃은, 혼자사는 K의 자취방에
아직도 걸려 있습니다. 수분은 모두 말라버렸고, 먼지마저 소복이 쌓인
채로....
그후부터 K는 일에만 매달려 왔습니다.
텅빈것 같은 가슴을, 허기진듯 항상 시장기를 느끼는 심장은 그 무엇
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일에만 집착하는 지도 모르죠.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공허함은 더욱 깊어만 가고, 이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예감이 더욱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만남 그리고 사랑...
그렇게 한참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K는 테이블을 대충 정리한 뒤 까페를
나왔읍니다.
그동안 비는 가늘어져, 이젠 보슬비 처럼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굳이 우산을 쓸 필요도 없는.....
차를 주차시켜 둔 곳으로 가다가, K는 발걸음을 멈추었읍니다.
그 곳은 길거리에 노점처럼 꽃을 팔고 있는 행상이었습니다.
K는 바케스에 몇송이 남아있지 않은 장미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빗방울들이 꽃잎에 망울져 있는 짙은 붉은색의 꽃을.....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다가왔습니다.
"꽃 사시게요 ?"
"....... 장미꽃 한송이만 주세요"
K는 자기도 모르게 사버린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천천히 걸어갔읍니다.
아름다운 장미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향기도 맡아 보면서...
그러다가, K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았읍니다.
조금 뒤에서, 혼자 걸어오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읍니다.
K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불쑥 장미꽃을 내밀었읍니다.
"저.. 이 꽃 받으세요"
그녀는 무척이나 놀란듯, 흠찟거리고는 가만히 K를 바라보았읍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K는 웃음을 띄며,
"아무런 의미도 없읍니다, 그냥 이 꽃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읍니다"
그러면서, 떠 맡기듯이 그녀의 손에 쥐어준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
섰읍니다. 안양에도 비가 오고 있었읍니다.
자취집으로 돌아온 K 는 대충 씻고나서 소설을 집어들었읍니다.
몇 페이지를 뒤적이다 이내 덮어버렸읍니다. 비 때문인가요 ?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쓸쓸함을 느꼈읍니다.
혼자 산지도 꽤 돼어 이젠 고독과도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항상 펴져있는 이불,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옷가지들, 아무렇게나 쌓여던
책들, 먼지가 뽀얗게 덮힌 전화기..
이 모든 것들에서 쓸쓸함이 스며 나오는것 같았읍니다.
발디딜 틈도 없이 어지러운 방이지만 시리도록 허전함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읍니다. K는 PC 앞에 앉았읍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kids에 접속을 했고, 여전히 썰렁하기 그지없는 고대
Board를 거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읍니다. 그러다, 우연히 들러본 **
Board에서 '장미꽃 한송이'라는 제목을 보았읍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 글을 읽던 K는 곧 웃어버리고 말았읍니다.
그 글에는 불과 한 시간전에 자신이 했던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릇한 흥분을 느낀 K는 곧장 'Square' 로 가서 그녀를 찾아 보았읍니다.
그녀는 아직 접속해 있더군요. Pager도 on이고. 'Talk' 을 신청했읍니다.
응답이 오고.. 서로의 인사가 끝난뒤,
K : "쓰신 글이 재미있어서 이렇게 Talk을 걸었읍니다"
J : "아.. 예.... 후후.. 전 무척 당황했었어요"
K : "기분이 나쁘지 않던가요 ?"
J : "헤헤.. 글에쓴 그대로예요.. 처음에는 황당했는데...
사실, 비오는 날 꽃을 선물(?) 받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네요.."
K : "하하하... 그래도 그 꽃을 버리지 않으셔셔 고맙습니다"
J : "예 ?.. 고맙다니요 ?"
K : "사실... 그 꽃을 준 사람이 바로 접니다"
J : ".......................... 예 ??????"
K : "놀라셨나요 ?... 당연히 놀라셨겠지요... 죄송합니다"
J : "저기....정말이예요 ????"
K : "예... 그 때가 8시 40분쯤 되었지요 ?.. 장소는 **에서"
J : "어머나 ... K님... 오늘 저를 두번씩이나 놀라게 하시네요 !"
K : "하하..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는군요... 기분이 나쁘셨나요 ?"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으로 K와 J는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했읍니다.
그날 부터는 K는 kids에 접속이 되자 곧장 'Square'로 갑니다.
그리고는 Talk을 하지요... 물론, J와.
그후로 그들은 가끔 만나기도 했읍니다.
영화도 보고, 음악회도 가고. 일에만 매달려 살던 K는 이렇게 빈 가슴을
채워 갔읍니다.
하루는 둘이서 길을 걷고 있었읍니다.
그들의 앞에는 한쌍의 남녀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읍니다.
K는 팔꿈치로 J의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앞에서 팔짱끼고 걸어가는 남녀
를 턱으로 가리켰읍니다.
J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을 보고 피식~ 하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읍니다.
그리고는 살며시... K의 팔장을 꼈읍니다.
K의 입은 찢어질듯이 벌어졌지요.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또 몇개월이 지나갔읍니다.
이젠, 넋살좋은 K는 가끔씩 J의 집에 저녁얻어 먹으러도 갑니다.
"어머님~~ 저 왔읍니다~~"
"아니.. 이사람.. 누구 맘대로 어머님이야 ?"
그렇게 말씀 하시면서도 항상 밥은 꾹꾹 눌러서 듬뿍.
.... 시련 그리고 더 깊은 사랑 ....
그날도 K는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J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막 퇴근 하려고 할때 전화가 왔읍니다.
전화를 받던 K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읍니다. 전화를 끊고 황급히 달려
나갑니다.
조금후, K는 **병원에 도착했고 수술실 앞에서 J의 부모님을 뵈었읍니다.
약속 장소로 가던 J가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쳤던 것입니다.
4시간동안 수술실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읍니다.
마음이 급하면 시간은 느리게 가나요 ?
지금 K에게는 시간이 멈추어 버린듯 느껴집니다.
가끔, 수술복을 입은 몇사람이 들어가고 나오곤 했읍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J가 누어있는 침대가 나왔읍니다.
그동안 눈물을 훔치고 계시던 어머님은 울움을 터트립니다.
아버님은 의사 선생님께 상태를 물어보았읍니다.
"힘든 수술이었지만 성공적이었읍니다"
"아버지 되십니까 ?"
"예"
"조금있다가 저랑 얘기좀 하시지요"
J는 회복실로 갔다가 곧 입원실로 옮겨졌읍니다. 그동안 J는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았읍니다.
J의 아버님과 K는 의사선생님 방으로 갔읍니다. J는 허리를 심하게
다쳤고, 수술은 성공적이지만 일시적으로 하반신 마비가 올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읍니다. 그리고, 꾸준히 걷는 연습을 해야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강조하셨읍니다.
좋다는 말인가요 나쁘다는 말인가요 ?
애매한 말이지만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큰 불안은 떨쳤읍니다.
하지만, 마취에서 깨어난 J는 의사선생님의 말을듣고 얼굴에 짙은 그림
자를 드리웠읍니다. 하반신 마비.... 이 얘기만 마음에 새겼읍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한 K는 거의 매일 J에게 갔읍니다. 그러나 J는 갈수록
야위어만 갔읍니다. 의사 선생님은 식사 잘하고 계속, 꾸준히 걷는 연습
을 해서 하반신의 감각을 되찾으라고 설득도 하고 꾸중도 했읍니다.
하지만 J에게는 이 말들이 단순히 자기를 위로하는 말로만 받아들여졌
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걱정은 커져만 갔읍니다. '일시적인 하반신 마비'라는 말을
꺼내는게 아닌데....
힘내고 연습만 하면 다시 걸을 수 있다고 달래도 보았읍니다.
강제로 끌어내려 움직여 보려고도 했었읍니다.
그려면 J는 땅바닥에 엎드려 울기만 합니다. 자포자기...
J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포기한채 버려두고 있었읍니다.
J의 학교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지만 모두 그냥 돌아갔읍니다.
가족외에 입원실을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K 뿐이었읍니다.
J가 그렇게 야위어 가면서 K 역시 눈에 띄게 수척해져 갔읍니다.
밤새워 J 옆에서 이야기도 하고 밥도 떠먹여 주었지만, J는 가끔씩
눈물을 흘리며 슬픈 눈으로 K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J는 K에게 말을 했읍니다.
"오빠..."
"왜.."
"이젠... 나보러 오지마...."
"......"
"나같은.. 불구자보다... 더 이쁘고... 착한 좋은 여자 만나...."
".... 그게 무슨 소리야 ! 그런 생각 하지도 마 !
넌 다시 걸을 수 있다니까... 밥먹고 힘내서 걸어보자.. 응 ?"
".. 아니야.... .. 됐어...... 그동안.. 행복했고... 고마웠어... 흑.."
"... 너... 또다시 그런 소리하면 나 화낸다 !"
K는 J가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았읍니다. 고개를 돌리고
울고있는 J의 곁에서 K도 울고 있었읍니다.
다음날 K는 의사선생님에게로 갔읍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J는 다시 걸을
수 없냐는 질문을 했읍니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안먹고 또 걷는 연습도 안하면 힘들어요...
J양은 지금 자포자기 상태인데... 거의 삶을 포기한 것같이 생각되요.
저도 정말 안타까워요.."
K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읍니다.
"제일 큰 문제는 걸어보겠다는 의지와 용기가 없다는 거예요.
살아야 겠다는 동기, 걸어보겠다는 용기와 희망을 줄 수만 있다면.."
K는 방을 나왔읍니다.복도에서 한참동안 가만히 서있었읍니다.
그리고는 J의 병실로 다시 돌아갔읍니다. 침대옆에 가만히 앉아 J의
머리를 쓰다듬어 봅니다.
"나 갈께.."
J는 잘가라는 말도 하지 않은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읍니다.
K는 J의 지갑에서 무언가를 빼내어 주머니에 넣고는 집으로 돌아갔읍니다.
그날밤 K는 3년동안 끊었던 술을 마셨읍니다. 취할때까지 마셨읍니다.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동료 L이 K의 모습을 보고 술집에 들어와
마주 앉았읍니다. 둘은 밤늦게까지 마시고, 울고, 또 마셨읍니다.
다음날 저녁. K는 여느때와 같이 J의 병실로 들어왔읍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한 후로는 K에게 더욱 냉담해진 J는 눈길한번 주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조용히 J의 침대 옆에 앉았읍니다. J의 머리를 쓰다듬어 봅니다.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J는 말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K는 장미 한송이와 흰 편지봉투 하나를 건내 주었읍니다.
장미꽃을 바라보던 눈이 편지봉투에서 멈추었읍니다.
"열어봐"
J는 힘없이 편지봉투를 열었읍니다. 접혀진 종이한장이 있었읍니다.
그것을 펼쳐보던 J는 갑자기 멈춘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읍니다.
J의 손이 떨려오면서... 가만히 K를 바라봅니다.
K는 J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냥 미소를 짓고 있을뿐.
J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집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턱밑에 고여 떨어집니다.
"...오..빠... 나.... 나.... 걸을께... 걸을꺼야....."
그리고는 큰소리로 울면서 K의 가슴에 안겼읍니다.
품에 안겨 엉엉 울고있는 J를 가만히 껴안고 웃고 있읍니다.
J의 어머니께서 땅에 떨어진 그 종이를 펼쳐 보았읍니다.
"아니... 이 사람이... 이 사람이..."
그것은 '혼인 신고서' 사본이었읍니다.
"반지는 나중에 같이 사러 가자.."
Epilogue
지금 K는.....
한껏 미소를 머금고 사뿐히 걸어오는 J를 바라보고 있읍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흰 웨딩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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