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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스는 배리 삼존불에서 시작하여 산기슭을 따라 삼릉을 답사하고, 냉골(삼릉계곡)을 따라 금오산 정상을 거쳐 용장계곡으로 하산하는, 등산을 하면서 문화유적을 관광할 수 있는 코스로서 도시락 및 음료를 준비하여야 하고 등산 차림이 필요하다. 이 코스는 편의상 서남산주차장에 주차하고 삼릉에서 부터 시작하여도 좋다.
소요시간 : 6시간 정도(단순 등산은 3.5시간 정도) 이 코스는 시간에 따라 이용이 가능하다. 3시간 정도라면 상선암 위 바둑바위까지 갔다가 서남산주차장으로 돌아오면되고, 2시간 정도라면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까지 왕복하면 되며, 1시간 정도라면 선각육존불 까지 왕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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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스는 신라시대의 석불을 시대적으로 모두 만날 수 있는 신라석불의 보고이다. 먼저 삼국시대의 대표적 걸작인 배리삼존불, 통일신라의 문화적 성숙기에 조성된 풍만하면서도 늠름한 기상이 보이는 냉골 석조여래좌상, 하늘에서 하강하는 모습의 마애관음입상, 힘있는 붓으로 한번에 그린 듯한 선각육존불, 남산에서 유일한 고려초기의 마애여래좌상, 통일직후의 아름다우면서도 힘차게 타오르는 불꽃이 아름다운 석조여래좌상, 산길을 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살며시 그림자를 보여주는 듯한 선각마애여래상,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크며 바위 속에서 현신하는 순간을 새긴 마애여래대좌불,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면서도 거대한 바위산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우뚝 선 용장사 삼층석탑, 남산에서 가장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년기의 마애여래좌상, 대현스님께서 기도하면서 돌면 불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는 삼륜대좌불, 김시습이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용장사지, 신라하대 방형대좌의 약사여래좌상 등 실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초기까지 신라불상을 두루 만날 수 있는 코스이다. |
배리 삼존불(배리 석불입상, 보물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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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석불은 이곳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어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본존불은 높이 2.66m, 좌우의 보살상은 높이 2.3m이다. 특히 조각 솜씨가 뛰어나 다정한 얼굴과 몸 등이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인 신비가 풍기고 있다.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간직한 이 석불들은 7세기 중엽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적인 것이다. 1988년 보호각을 지어 부처님의 미소를 볼 수 없었으나 곧(2007년) 철거 한다고 하니 곧 부처님의 천진한 미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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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삼릉(사적 2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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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곡 북쪽 언덕에는 많은 무덤들이 줄지어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지금은 세 개의 릉만 남아 있어 삼릉(三陵)이라 부르고 있다. 제일 앞의 무덤은 신라 54대 경명왕릉(景明王 : 917 ~ 924)이라 전해 오는 릉이고 가운데 것이 53대 신덕왕릉(神德王 : 912 ~ 917) 이라 전해 오는 릉이다.
맨 뒤의 것은 8대 아달라왕릉(阿達羅王 : 154 ~ 184)이라 전해 오고 있는데, 초기 임금님의 릉이 왜 이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덤들은 원래 봉분 둘레에 호석(護石)을 쌓고 큰 자연암석(自然岩石)을 둘러놓은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과 같은 양식 이었는데 지금은 다 묻혀 원형토분(圓形土墳)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 있는 경명왕릉에서는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53대 신덕왕릉으로 알려져 있는 가운데 무덤은, 1935년 1963년에 도굴되었으며, 1963년 조사에 의하면, 석실 연도(羨道)에서 오방색(주, 황, 백, 군청, 감청색)이 확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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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골 석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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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약 500m쯤 가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계신다. 현재 높이가 1.6m되고 무릎 너비가 1.56m되는 큰 좌불이다. 최근까지 계곡에 묻혀 있다가, 1964년 발견되어 지금 장소에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纓總)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 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 끈이 있기 때문에 존명을 정하기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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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관음보살입상(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지방유형문화재 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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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없는 여래상에서 북쪽 산등성이를 쳐다보면 뾰죽한 기둥바위들이 높고 낮게 솟아 있는데 그 중 한 바위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하계(下界)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觀世音菩薩立像)이 새겨져 있다. 살결이 풍만한 얼굴은 미소를 머금었고 오른손은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는 화불(化佛)을 배치하여 관세음보살임을 표시하였는데 목걸이와 가사를 동여맨 끈은 나비날개 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발가락 끝에까지 피가 도는 듯 섬세하게 조각된 이 불상은 따스한 촉감을 일으키는 복련(伏蓮)위에 서 계신다.
그런데 이 관음상이 서 있는 자리에는 전각을 지을 만한 곳도 없고 기와조각도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처음부터 노천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을 비바람이 치는 노천에 세운 것은 무슨 뜻일까? 산벼래에 불상을 새기고 산기슭에서 올려다 보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고 하강하여 주시는 그 감격을 극적(劇的)인 모습으로 나타내려 함이 아니었을까?
광배 없이 3m 정도 뒤쪽의 비스듬한 바위를 광배삼아 보살상을 조각하므로서 방금 하늘에서 하강한 듯한 모습이다. 이 불상이 진정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순간은 석양 해질 무렵이다. 단풍이 드는 가을철 석양 때가 더욱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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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육존불(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지방유형문화재 2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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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골짜기 왼쪽에 자리잡은 넓다란 바위에 선각으로만 새겨져 있는 불상이 있다. 경주에서 음각으로만 되어 있는 불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 선각육존불상은 뛰어난 신라불교의 회화를 보는 듯한 모습이다.
동쪽 바위 면에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새기고, 서쪽 바위 면에 아미타 삼존불을 새겨, 현생과 내생을 나타내었다. 아미타삼존불은 좌우에 보살이 두 손에 꽃을 받쳐들고, 부처님은 죽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시는 내영아미타여래 (來迎阿彌陀如來)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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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좌상(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지방유형문화재 1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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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육존불에서 등성이로 계속 200m쯤 올라가면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m쯤 되는 넓은 절벽바위가 서향으로 서 있다. 그 암벽 중앙에 지름 2.5m쯤 되는 연꽃 위에 설법인(說法印)을 표시하고 앉아 계신 여래상이 있다. 몸체는 모두 선각(線刻)으로 나타내었는데 얼굴만은 깍아 내어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두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텁고 커서 균형 잡힌 얼굴이라 할 수 없으나 소박한 위엄이 있다.옆에는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중요한 선은 굵게 그었고 옷주름 같은 것은 가는 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상 전체에서 재주를 부리지 않는 소박한 느낌을 느끼게 되는데, 남산 부처님은 바위 속에 숨어 계시다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실 때는 언제나 누추한 차림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깊이 신앙하고 있었다. 이 마애불은 남산에서 가장 늦은 시기인 고려초기 즉 10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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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좌상(삼릉계 석불좌상, 보물 6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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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골 골짜기 옆 솔숲에 많은 바위무리가 있고, 그 가운데 순백 화강암으로 조성된 여래상이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앉아 계신다. 연화대좌는 투박하게 8각으로 깍은 하대석과 면마다 안상을 새긴 중대석을 놓고 중대석위에 얹혀 있다. 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로 장식된 화려한 둥근 연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의 꽃송이인 것이다.
이 불상 위에는 전각을 지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노천불이었던 것이다. 건물을 지을 경우 주위 환경의 분위기와 조화되지 않을 경우에는 부처님께서 비바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집을 짓지 않았다. 가장 참된 것은 조화의 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우리 조상님들은 편리하기 위해서 미를 파괴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불상의 광배의 안쪽에는 부드러운 넝쿨무늬를 새기고 바깥쪽은 힘있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윗 부분이 조금 깨진 채로 불상 후면에 세워졌으나 1963년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산산조각나 버렸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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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마애여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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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좌상 옆 계곡 30여m의 바위 절벽면에 머리 부분만 선각으로 새긴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바위 속에서 숨어있다가 살며시 그림자를 드러내 반겨 주는 듯한 모습이다. 이 마애불은 석조여래좌상에서 개울을 건너, 무덤 위 절벽에서 건너다 보아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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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암 선각보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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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암은 옛 절터에 70여년 전 사찰이 세워진 곳이다. 절 부엌 바로 뒤에 파괴된 바위에 보살상의 하반신만 선각으로 남아 있다. 본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완전할 경우 6미터가 넘는 대불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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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암 마애대좌불(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지방유형문화재 1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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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 암반의 벽면에 6m 높이로 양각된 이 여래좌상은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며, 얼굴의 앞면과 귀부분 까지는 원만하게 새겨진 반면, 머리 뒷부분은 투박하게 바위를 쪼아 내었다. 불상의 몸부분은 선이 거칠고 억세게 조각하였고, 좌대 부분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불교가 바위신앙과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순간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불상의 조각연대는 통일신라 하대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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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정터와 바둑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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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골, 암봉 바위산 꼭대기에는 자연을 잘 이용한 금송정터라고 전해오는 건축터가 있다. 또는 봉생암터라고도 한다. 그 옆 바위 벌판에는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며 놀았다고 하며, 전망이 좋아 서라벌 벌판 전체와 북남산이 모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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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바위와 소석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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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신 상심(祥審)이 살고 있는 바위로서 동쪽면은 남근석과 기도처, 서쪽 면은 산아당(産兒堂)으로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들 낳기를 기도하는데 영험이 있다. 상심은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기도 하였다. 상사바위의 동쪽에는 머리와 발을 잃어버린 작은 석불이 1구 있는데, 남산에서 발견된 가장 작은 석불이다. 상사바위 앞 공간도 옛 절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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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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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68M로서 이곳에서 냉골, 포석계, 지바위골, 비파골, 약수골 등의 분수령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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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령 대연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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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계곡의 동북쪽 능선의 대암반상에 있는 거암을 그대로 대좌로 삼아 그 상면에 웅려무비한 솜씨의 대연화를 새기고 그 위에 석불이 안치되었었다. 이 연화대의 위치는 금오산정에서 남으로 산맥이 세갈래로 갈라 내려온 중앙의 산령이라 그 동으로 내려간 산령은 고위산과 연하는 분수산맥을 이루고 서편은 용장사탑이 서 있는 산령이다. 앞으로는 고위산을 바로 대하고, 동으로 동대산령의 토함산 불국사까지, 서로는 단석준령을 바라보는 극히 높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그 자리에는 앞으로 또 한 계단 만들어졌으나 겨우 7-8m 의 여지를 두고 바로 아래는 백척심곡으로 예참을 허할 수 있을 뿐 가람을 세운 흔적이 없고 세울 수도 없는 터이다. 이를 천혜의 불영지로 보고 불상과 연화대를 새겨 그대로 예참정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선덕여왕 때 스님 생의는 언제나 도중사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 놓게 하더니 남쪽 골짜기로 와서 말했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를 파내어 고개 위에 편히 올려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표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 보니 거기에서 돌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로 옮겨 놓고 그 아래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절 이름을 생의사라고 했다. 충담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다려서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님이다. (三國遺事 第三卷 塔像 第四 生義寺 石彌勒).
충담스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경덕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만에 오악삼산의 신들이 간혹 모습을 나타내어 대궐의 뜰에서 왕을 모시었다. 3월 3일에 왕은 귀정문의 누상에 나아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도중에서 영복승(榮服僧) 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겠소." 이 때 마침 큰스님이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고 있었다. 좌우의 신하가 바라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었다. 왕은 "내가 말하는 영승(榮僧)이 아니다." 하고 물리쳤다.
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를 걸치고 삼태기를 걸치고 남쪽에서 왔다.왕은 기뻐하며 누상으로 인도하였다. 삼태기의 속을 바라보니 다구만이 가득하여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충담이라 하옵니다.""어디서 왔소?""저는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나에게 차 한 사발을 주시겠소?"스님은 차를 다려 왕께 드렸는데 차 맛이 이상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
"내가 듣건대 스님께서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스님은 즉시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었다. 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국사로 봉하니 스님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을 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신하는 사랑하는 어머니요, 백성들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 지면, 백성들이 스스로 사랑 받는 줄 알리이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이 사랑을 먹고 스스로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면, 나라안이 감히 되어 감을 알리이다. 아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三國遺事 第二卷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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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기단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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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 최상부에 있는 석재 기단인데, 탑기단인지 확실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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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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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 삼륜대좌불 뒷편 동쪽으로 높이 5.5m, 폭 3.6m 가량 되는 암면이 남향을 하고 있고 그 바위면에 고운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상이 있다. 이 마애불은 손상이 거이 없이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얇게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는데 대좌의 연꽃은 정면 꽃잎은 비교적 크게 나타내고 양 가장자리로 가면서 차츰차츰 작게 하여 끝에서는 구름처럼 사라지도록 하였다.
불상은 풍만하고 건장한 위엄을 느끼게 하고 결가부좌로 앉은 두 무릎과 넓은 두 어깨는 당당하다.상호는 머리 깊이를 반분한 자리에 눈썹이 길게 그어졌고 양눈썹에 이어 아래로 뻗어 내린 예리한 콧등은 얼굴길이의 ⅓쯤에서 고운 코를 형성하였다. 굳게 다문 입술은 양가에 힘을 주어 긴장된 표정인데 풍성한 두뺨과 군살어린 턱의 부드러움은 자비롭기 그지없다.
육계는 얼굴과 조화롭게 덩실 솟았고 머리카락은 나발로 표현되어 있다. 옷자락은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느낌으로 잘게 주름을 잡아 놓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이 두겹의 원으로 표현되었고 신광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광 좌측에는 명문이 3행으로 10여자 있으나 판독이 어렵다.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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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 삼륜대좌불(용장사곡 석불좌상, 보물 18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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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의 동쪽 등성이에 우리 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얹혀있는 석불좌상이 있다. 현재는 머리가 없어져서 존명을 알 수 없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지대석은 자연석을 윗면만 고르게 가공하여 쓰고 있는데 지대석이자 곧 기단으로 보여진다. 높이 1m 남짓한 이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북모양의 중대괴임을 얹고 그 위에 쟁반모양의 둥근 반석을 놓았고 다시 그 위에 중대석과 반석을 놓았고 세 번째의 중대괴임을 결구시킨 후 앙련의 둥근 반석대좌를 마련한 후 그 위에 화려한 연꽃방석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모셔 놓았다. 불상의 스인은 반대로 된 항마촉지인인데 인도나 중국,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어 존명을 정하기가 어렵다.
불상의 높이는 연꽃방석 밑에서 목까지가 141Cm이고 대좌의 높이는 315Cm로서 총 456Cm에 달한다. 불상은 결가부좌로 앉고 오른손은 선정인을 왼손은 무릎 위에 얹은 인상을 취하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고 흘러내린 가사깃 사이엔 승기지가 비스듬히 가슴을 가리고 매듭이 맵시 있게 조각되어 있다. 또 왼쪽 어깨에 드리워진 가사끈의 수실은 이 불상을 승상이라고 거론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이다. 흘러내린 가사 자락들은 물결처럼 펄럭이며 무릎을 덮고 흘러내려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삼국유사의 賢瑜伽, 海華嚴 조에 의하면, 옛날 용장사에 유가종의 대덕이신 대현스님이 계셨는데, 그 절에는 미륵장륙석상이 있어 대현스님이 그 미륵부처님을 기도하면서 돌면, 미륵부처님 또한 대현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불상을 삼국유사의 이야기처럼 미륵불이라 한다면 기단석 위가 사왕천이 되고 처음의 둥근 반석 위는 도리천, 두 번째 반석 위는 야마천이 되며 마지막의 연화 원반대좌는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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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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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골 어귀에 있는 마을 이름이 용장리이고 계곡 이름도 용장골이니 모두가 용장사에서 기인된 이름들이다. 용장사는 이 계곡의 주인격일 뿐 아니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는 대가람이었다. 용장골의 남쪽면은 수리산을 정상으로 하여 흘러내린 여러 갈래의 계곡들로 되었는데 열반골의 기암과 괴암들이며 은적암 부근의 삼각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 금오산에서 뻗어내린 여러 산맥들로 구성된 북쪽면에는 이렇다 할 잘생긴 봉우리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용장사가 자리잡은 그 봉우리만이 거대한 바위들로 첩첩이 솟아 있다.
용장사는 어느 시대에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초기 설잠스님(김시습)이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고 하니 조선초기까지는 절이 있었고, 지금은 절터 축대들과 기와 조각들만이 폐허를 뒹굴고 있다.
용장사 ...................... (김시습)
용장골 골 깊어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작은 창가엔 사슴 함께 잠들었어라 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쌓였는데 깰 줄을 모르는구나 억새처마 밑에서 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나그네의 길 ...................... (김시습)
천봉만학 저 너머에 외롭게 떠 있는 구름 한 점 새 한 마리 홀로 돌아가네
금년이야 이 절에서 머문다지만 내년에는 어느 산으로 가야 할지...
소나무 그림자 비치는 창문엔 바람조차 고요하고
향불마저 꺼진 선방에는 쓸쓸하기 그지없네
이 생은 이미 내 몫이 아닌 줄 알았으니,
물길 따라 흐르는 대로 구름 따라 떠도는 대로
그냥 흘러 흘러 가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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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재와 석등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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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탑 하층기단갑석 1쪽과 옥개석 1매, 석등대석만 남아있다. 이 탑재로 보아 이곳에도 석탑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석등대석은 밤에 이곳을 찾는 사람을 위한 등대로서의 석등이다.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삼층석탑은 하늘나라의 부처님나라를 우러러보는 듯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절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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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계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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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계 절골은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입구를 찾기가 힘든다. 계골을 올라가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무너진 축대가 2곳 있고, 좀 더 올라가면 큰 축대가 나타난다. 금당터 한가운데 남향으로 앉으신 이 불상은 1940년 당시에는 산에서 흘러온 모래와 자갈돌에 묻혀 있었던 것을 발굴 조사한 것인데, 머리와 배광은 찾지 못하고 대좌와 몸체만 발견되었다 한다. 이 불상의 대좌는 지금 땅속에 묻혀 있는데,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삼단으로 된 남산에서 셋밖에 없는 희귀한 방형대좌라 이다. 축대 아래 계곡에는 석탑 옥개석 1매와, 하층기단석 1매가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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